박인주의원
여러분, 대단히 반갑습니다. 박인주 의원입니다. 저는 양산의 중심과 관련된 두 가지 사항에 대하여 질문하겠습니다. 마침 이번 기에 현충사종합정비계획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촉구하면서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먼저, 삼조의열단 정비와 충렬사 건립에 대한 질문입니다. 강서동 소재 삼조의열단, 일명 장춘단은 8.15 해방 무렵 지역유지들의 모임인 춘추계에서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선열들의 비를 지금의 장소로 옮겨와 단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어 이에 대한 개선책을 함께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을 짚어보면, 첫째, 선대를 모신 삼조의열단이 후대에 해당하는 충혼탑보다 아래쪽에 자리하게 되어 상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이며, 둘째, 당초 삼조의열단은 삼조 즉, 신라, 고려, 조선조의 인물 각 한 분씩을 모시자는 취지로 조성되었음에도, 그 이후에 군민의 합의 없이 모 문중에서 임의로 두 분의 비를 추가로 세워 형평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 삼조의열, 임란공신, 항일열사 등 모든 선열들의 위패를 한자리에 모실 수 있는 사당 즉, 충렬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이런 문제점에 대하여 지역을 아끼는 많은 단체에서 건의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우리 시에서는 유독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도가 낮은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충렬의 고장으로서 그 위상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금번에 실시하는 춘추근린공원 조성계획과 연계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말끔히 해결하고 대대적인 성역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음에서 각계에서 제안하는 내용들을 종합하여 정비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먼저, 삼조의열단에는 당초 조성취지에 맞도록 박제상, 김원현, 조영규 세 분의 비만 남김으로써 오랫동안 지속돼온 논란을 종식시켜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시에서는 해당 문중과 협의하여 남은 두 분의 비는 연고지인 상북면 율리마을과 내전마을로 옮기는 방안 등을 적극 강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지금까지 사당이 없어 노천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음은 물론, 특정인 몇 분만 모시고 있는 관계로 임란공신 20여 분과 항일독립운동가 70여 분의 후예를 비롯한 대다수 시민들이 장춘단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충렬사 건립을 결정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연후에 각 시설물을 전통의례와 시민정서에 맞게 위치를 종합적으로 재배치하고 성역을 확대 정비하여야 합니다. 크게 보아서 최상단으로부터 삼조의열단, 충렬사, 충혼탑 순서로 배열하되, 충렬사 양측에 임란공신비와 항일기념비를 별도로 하나씩 건립하자는 것이 전문가와 원로들의 중론인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금번 춘추공원의 확대 정비사업이라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충렬의 고장 양산의 위상을 명실상부하게 제고할 수 있는 삼조의열단 정비와 충렬사 건립에 대하여 전향적으로 판단하여 주시기 바라면서, 이에 대한 시의 견해와 계획을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윤현진 선생 선양사업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윤현진 선생은 15세 때부터 30세에 요절을 했습니다. 약 15년 동안 우리 국가 독립을 위해 가지고 엄청나게 많은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생생하게 여러분들에게 알리는 그런 자리라 조금 문장이 깁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인 우산 윤현진 선생은 박제상 공 이래 우리 양산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30년이란 짧은 일생을 불꽃같이 살다간 선생의 큰 삶을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간략하게나마 선생의 생애를 되짚어보겠습니다. 1892년 상북면 소토리에서 출생하신 선생께서는 일본 명치대학교 유학 시절부터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진두지휘하였으며, 1909년 귀국 후에는 백산 안희제 등과 비밀결사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일본상인들의 경제적 침탈을 막기 위해 의춘상행을 설립하여 소비자 계몽운동에도 앞장서 왔습니다. 3.1독립운동 때는 양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후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김구, 여운형 등 독립지사와 교류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습니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어 백산상회의 자금을 군자금으로 헌납케 하고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는 등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국민대표회의 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중한국민보호조사를 결성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건강을 돌보지 않고 독립투쟁에 헌신한 결과로 1921년 9월 17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니 당시 일제의 신문이 그의 사망은 곧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하였을 만큼 그의 위치는 우뚝하였습니다. 선생은 임정 요인들의 애도 속에 임시정부 국장으로 상해의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1995년에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제1상단에 모셔져 있습니다. 74년 만에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긴 셈입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윤현진 선생은 그 뜨거운 정신과 기상은 물론 실질적인 활동에 있어서도 독립운동사에 눈부신 족적을 남긴 위대한 애국지사로서 우리 양산의 큰 자랑이자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2006년 부산시에서 ‘부산을 빛낸 인물’의 한 사람으로 윤현진 선생을 선정한 것을 보며 선생의 위대함을 새삼 확인함과 함께, 선생의 출생지인 우리 양산시가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는가 하는 자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까운 울산시의 경우 3.1운동 관련 각종 기념물이 7개소에 달하고, 독립운동가 박상진 선생에 대하여 동상 2개소, 추모비 1개소 외에 2007년에 13억원의 예산을 들여 생가를 복원한 것에 비해 우리 양산시에는 3.1운동 기념물이 전무하고 윤현진 선생 현충시설도 1959년 춘추공원에 세운 기념비가 유일하며, 이마저도 비석과 주변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산의 3.1운동이 결코 울산에 뒤지지 않았으며, 윤현진 선생의 활약상이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임에도, 이에 걸맞은 선양사업을 펼치지 못한 데 대해 우리 모두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만시지탄의 느낌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윤현진 선생의 생가 터 일대를 윤현진 선생 기념관으로 조성하고, 그 곳에 선생의 생가와 기념비를 새롭게 정비하여 교육관광자원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지금 건립 중인 시립도서관의 이름을 윤현진기념도서관으로 하여 선생의 애국정신과 충효사상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전달되도록 했으면 합니다. 이에 대한 시장의 견해와 계획을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