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인
안금식 아주 우리 김영구의장님께서 그냥 해박하게 연구를 엄청 많이 하셨습니다. 발언할 때는 제가 뒤에 앉아 있었는데 참 “너무나도 연구하고 준비를 참 많이 하셨구나!” 하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말씀을 올려야 할 것은 「적당이 오기를 기다리던 퇴앙 안종응과 하사, 김사정, 김용준의사가 모의하여」에 대해서 아까 김사정씨가 지평의병에 참여한게 사실이고요, 또 하사 안승우씨한테 원주로 들어가시라는 기록이 분명히 나오는데 그 날짜가 기사일 4일입니다. 기사일 4일의 날짜는 지평의병이 안창에서 창의한 두달후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모의를 하는데 동참했다는 얘기하고 김사정씨께서 안하사 보고 “원주로 들어가시오” 한 얘기하고는 이게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관점은 모의하는데 김사정씨가 창의한 역사적인 기록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관점은 이것인데 왜 이 사안이 중요하냐면은 물론 우리가 이춘영의병장의 처가댁이 되는 인목대비의 친정이기도 한 연암김씨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처가집이 되기 때문에. 우선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조금 보고말씀 겸해서 드려야 할 것은 저희가 “역사성이라는 것은 현장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의향지편찬위원회 위원님들 여덟분들이 7박8일에 걸쳐서 지평의병 행적지 이철기 현장을 탐방을 했습니다. 이철기를 탐방을 하고 나니까 저희도 윤곽이 좀 잡혔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의 문제하고는 별개입니다마는 장삼현교수님이 책을 쓰시는데 현장을 탐방 안하셨기 때문에 제천의 남산전투에서 안승우씨가 전사하셨는데 이 가웅전투에서 전사한걸로 이 책에 그렇게 서술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다릅니다. 이게 올바르게 어떤 역사성을 갖고 비문을 작성하셨으면은 오류가 없을텐데 이게 그런 현장을 답사 안하고서 했기 때문에 오류가 나오지 않나 이렇게 이해가 되어지면서도 아까 김영구의장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답변을 드리면서 이 분야가 김사정씨가 모의에 가담했느냐 안했느냐가 왜 중요한가 하면은 저는 이런 관점으로 생각을 해 봅니다. 김사정씨가 모의에 가담을 했다 한다면은 지평의병의 창의는 원주사람이 일견 한켠에서 진두지휘하는데 참여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우리 넓은 의미에서 양평의병 지금은 지평, 양근이 합쳐서 양평이 됐으니까 순수한 양평의병 창의, 옛날 역사속으로 말하면 지평의병 창의입니다. 지평의병의 창의가 우리 양평사람들이 주도한게 아니라 원주사람들로 개진됐다는 오류가 나오기 때문에 저는 이걸 냉철하게 구분하고 가자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동안에 정신문화원 또 국립도서관 또 국회도서관 수차례 갔다 왔습니다. 이것은 역사는 바탕을 갖고 가야 되는데 이게 그 어디에서도 김사정씨가 모의에 가담했다는 기록근거를 사료에서 찾아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저는 오류라고 생각을 하고요, 또 분명히 비문에 장삼현교수가 남기시기를 「적당이 오기를 기다리던 퇴앙 안종응과」 안종응과로 시작됐습니다. 「안종응과 하사, 괴은, 김사정, 김용준」 이렇게 될 때 퇴앙 안종응과 김사정이 만난 근거가 있느냐 이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없다면 잘못된게 아니냐 그런 시각을 갖고 이걸 말씀을 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또하나 기왕 말씀 올리는 김에 제가 준비한 자료에 첫머리가 있습니다. 맨 윗부분입니다. 거기 비문속에 나오는 것이 이런 귀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류인석선생이 제천 장담에서 문인사우들과 처변의 도리를 논의하였는데 하사 안승우, 괴은 이춘영 두의사는 거의소청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나오는데 저희는 장담에를 다녀왔습니다. 장담이 적어도 제천시내에서 30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지평의진이 안창에서 창의해 가지고 원주를 거쳐 제천에 들어갔었을 적에 이필희씨라든지 서상렬씨라든지 이런 분들이 제천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면은 장담으로 모인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30리라는 지역적인 오차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건 큰 오류입니다, 이게. 그래서 여기에서 큰 문제점이 또 뭐냐, 안승우씨는 종의록에 보면은 퇴앙 안종응씨가 그 계책을, 이건 뒷페이지에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만 뒷페이지에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 계책을 이춘영씨가 물었을 때 김백선을 만나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포군을 중심으로 지평에서 의병이 거의할 수 있는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어갈제 그 아들 승우를 부르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전에 퇴앙 안종응하고 아드님이신 하사 안승우씨하고도 의병을 하기 위한 어떤 계책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와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의병이 일어나게 된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 승우 아들을 부른 것만 기록에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승우하고 그 아버지 되는 퇴앙 안종응씨하고도 계책을 논의했다고는 볼 수가 없는 사안입니다. 여기서 또 그런데 왜 중요한가 하면은 우리는 이게 지평의병을 두고 역사속에 제천쪽에서는 우리 지평의병이 원주 안창에서 창의해 가지고 원주를 거쳐 제천에서 장협에 가서 싸움을 하게 됐습니다. 그 싸움을 할 때 원주나 제천에서 단 한사람의 병사도 발진 못했다는 기록을 105년 전에 안승우씨가 안하사 창의실기에 분명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천에 있는 세명대 구완회교수가 그 엄연히 그것은 지평의 군사들이기 때문에 지평의병 이렇게 표현해야 되는데 바야흐로 이것은 제천의병이 승전하는 찰라다 하고 제천의병으로 거기서부터 역사적으로 둔갑시켜 놓은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우리가 이것은 논쟁을 제천의 구완회교수하고도 벌여야 되고 또 이런 것을 공감하던 이창식교수님이 세명대에 계시는데 제가 항의를 했습니다, 전화로. 그래서 세명대교수가 “언제든지 불르면 여기 오겠다” 그래고 잘못 된거라고 세명대교수 이창식교수가 시인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첫 번째 구절중에서 “제천 장담에서 문인사우들과 처변의 도리를 논의 하였는데” 이 처변의 도리라는건 뭐냐하면은 여기 제가 책자를 아주 복사해서 붙였습니다. 첫 번에는 거의소청(거의소청), 거의소청은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소탕하자는 얘기고요. 두 번째 거지수구(거지수구), 국외에서 화맥의 개의를 홀로라도 지키자는 얘기고요. 또 세 번째는 자정치명(자정치명), 스스로 목숨을 끊음 이런건데 이 처변사가 논의가 됐지마는 그때 유인석씨는 의병을 일으키자는 쪽이 아니었고 중국으로 들어가자는 쪽 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문맥을 보면은 “장담에서 문인사후들과 처변의 도리를 논의 하였는데” 이렇게 하니까 마치 여기에 감각적으로 이 비문을 읽는 분은 유인석씨가 여기서 의병을 일으키자 하는걸로 논의 했는데 하사하고 괴은이춘영이가 따라줬다 하는 내용으로 돼 있는데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괴은 이춘영씨가 여기 기록에 맨 여기 말미에 이춘영의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에는 장담에 출입한 적이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거의소청에 동참해서 이춘영씨가 주장한걸로 돼 있거든요. 이건 제천쪽에서 저희는 지평의병 창의는 제일 처음에 저는 그런 시각으로 생각을 합니다. 퇴앙안종응씨하고 또 괴은이춘영씨하고 또 김백선씨하고 주역이 이 세분입니다. 왜 주역을 세분으로 봐야 되느냐 하면은 이 포군을 설득하는 과정에는 잘못 하면은 반대파가 있을 때 말한마디 잘못하면은 총뿌리를 겨누어서 쏴도 어디가서 항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목숨을 내걸고 포군을 설득하는 이런 분위기 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끼어 들은 것은 김백선하고 괴은이춘영이 입니다. 그러면 그때 하사안승우씨는 제천에 있었던겁니다. 의병을 다 거의해서 창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갖고 안창에 갔을 때 거기서 합류한게 안승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평의병의 주역은 퇴앙안종응, 또 괴은이춘영, 또 포군의 영수 김백선 이렇게 세사람으로 봐야 되고 이것은 제일 처음에는 그렇게 봅니다. 지금 제천쪽에서는 화서 이항노선생님이 출생지가 포천이라고 그래고 거기 유인석씨가 장담으로 이사와서 살았기 때문에 시원지를 거기라고 합니다. 원주, 화맥 이렇게 시원지를 따지면은 서종면 벽계가 시원지가 돼야 되는데 그 문헌속에서도 화서 이항노선생님은 양평분이라고 안 그러고 포천분이다 이렇게 하면서 퇴색을 시켜 가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비문에 옳게 잡아 지느냐, 안 잡아지느냐 하는 것은 밖으로 그런 문제에 자료를 엉뚱한 자료를 주느냐 안 주느냐 이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갈음이 분명히 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괴은이춘영씨가 있도 않았는데, 있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저는 이 자리를 빌어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아까 순위를 벗어나 말씀을 하셨지마는 역사적인 큰 안목은 우리 방홍규위원님이 대단히 갖고 계신 분입니다. 역사적인 흐림이나 안목을 저도 이 방홍규위원님한테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많이 가르침을 받고 도서관도 쫒아 다니고 하는데 성격이 급하셔서 표현은 잘 못 하시더라도 역사적인 큰 안목을 갖고 계십니다. 또 여기에도 장삼현교수가 만든 책에도 사료를 우리 방홍규선생이 많이 뒤받침 했다고 여기 기록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 방홍규선생님도 이춘영씨가 그때 장담에 출입 안 했다는 것은 정신문화원에 가서 명단까지 뽑아본 사실입니다. 아닌 것을 기인 것 처럼 돼 있는 것은 이것은 분명히 잘못돼 진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걸 우리가 그냥 넘어 간다면은 순수하게 목숨걸고 지평사람들이 의병 일으킨 것이 마치 장담에서 유인석씨나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계층쪽에서만 진두지해서 지평에서 그 진두지를 봐도 의병이 일어난냥 이렇게 됐는데 그건 아닙니다. 접목은 분명히 됐습니다. 그 접목이 어디서 됐는가 하면은 이춘영씨하고 서상렬씨하고 김백선씨가 주축이 되서 단양 장협에서 전투를 해 갖고 싸워서 이겼습니다. 대승했습니다. 대승을 했는데 그게 지평의 군사들 뿐이거든요. 이 책에 어떻게 표현했냐 하면은 대승을 한 전투를 대승했을 때는 제천의 의병이다 이렇게 표현을 해 놓고도 이 서론에다가는 “지평의병에 패하여 영월로 퇴군하고” 이렇게 세명대 구완회교수가 장닌질을 친 책이 바로 이책입니다. 그래 제가 제천문화원으로 항의를 하고 대승을 해서 분열이 되서 영월로 이동해 온걸 그걸 “패하여 퇴군하고”이렇게 한다면은 그건 왜 그렇게 했느냐, 지평의병의 맥락을 끊고 이것을 역사속에 제천의병으로 둔갑시켜 이끌어 가자니까 그렇게 장난질을 교수들이 친겁니다. 그래 저는 이것을 단언히 말씀 올리고 싶은 것은 그리고 이 비문속에 순위가 나오면은 하사 안승우, 그리고 뒤에 괴은 이춘영 이건 백번 잘못 된겁니다. 당연히 앞에는 누가 들어 가야 되냐 하면은 괴은 이춘영이 들어 가야 되고 또 지평의병을 얘기할 때는 책의 역사에 그렇게 기록이 돼 있는데 장삼현교수가 을미의병 기념비는 인용을 안 했는데 이 뒷면에 보면 말이지요 독립운동사 유한철 독립기념관에 독립운동사 연구소에 유한철연구관님이 이게 “유인석 사상과 의병”에 대한 책자에 순위를 이렇게 서술을 했습니다. 이게 이필희 의진지도부 구성 이게 지평의병입니다. 기록에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대장에 이필희, 중군에 이춘영, 선봉에 김백선, 군사에 서상렬, 군무도지사에 안승우” 안승우가 뒤에 가 있습니다. 이게 맞습니다. 왜 그러냐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 올린 것 처럼 이춘영, 김백선이 주역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그동안에 도서관을 쫒아 다니면서 정신문화연구원, 국립도서관 또 국회도서관 이렇게 쫒아 다니면서 사료를 많이 찾았습니다. 이춘영씨가 왜 또 앞에 가야 되는 당위성이 뭐냐 하면은 장위협전투를 하고 충주성을 치자고 했습니다, 서상렬씨가. 그런데 거기서 지평의병들이 밥도 제대로 못 먹고서 반대적인 견해가 일어나 갖고 분열이 돼 갖고 중령을 넘자, 중령을 넘었는데 넘으면서 이필희 대장을 죽이자 이래서 이필희대장은 지휘권을 이춘영씨한테 넘기고 안동쪽으로 가시고 그리고 이춘영의병대장이 지평의병을 지휘하면서 순흥에 가게 됐습니다. 순흥에 가 갖고 이 찾은 문건은 뭐냐 하면은 이춘영 의병대장이 거기서 정식으로다 이춘영 복위대장, 대장으로 정식으로다 추대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장충식일기 처의록에 나오는건데 이게 제천에서 이구형선생님이 번역을 하시면서 문화원에서 책을 만드는데 그 사료는 다 번역을 하면서도 이 장충식일기는 번역을 안 했습니다. 이건 왜 안 했느냐? 이게 우리 양평에서 해야 됩니다, 이제. 양평에 유력한 기록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걸 안 했습니다. 이것만 홀랑 빼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편찬위원회 할 때도 강력하게 제가 제창을 하면서 우리가 제천에서 번역 안 한 것은 이 장충식일기는 우리가 번역을 해야 한다. 제가 이렇게 건의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상 말씀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