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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회 회의록을 사실 그대로

경기 양평군의회 발언

이영호 의원 발언

84회 제2기념비및김찬제유허비진상조사특별위원회1999-11-12

이영호 의원 프로필 보기 →

영호

이영호위원장

성원이 되었으므로 을미의병기념비및김찬제유허비진상조사특별위원회 제2차 위원회를 개의 하겠습니다. 개의를 선포합니다. 먼저 의사담당주사로부터 오늘 상정될 안건보고가 있겠습니다. o 안건보고
봉진

전봉진의사담당주사

의사담당주사 전봉진입니다. 오늘 상정될 안건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오늘 상정될 안건은 지난 9일 제84회 양평군의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제안설명을 들으시고 본 특별위원회로 회부된 안건으로서 의사일정 제1항 을미의병기념비및김찬제유허비진상조사의건이 상정되겠습니다. 이상으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그럼 의사일정 제1항 을미의병기념비및김찬제유허비진상조사의건을 상정합니다. 오늘 회의는 을미의병기념비 및 김찬제유허비에 관련한 진술을 위해 참고인으로 출석해 주신 전문학자 및 관계자 여러분을 한분씩 모셔서 진상조사와 관련한 참고인의 진술을 들으신 후 특별위원 여러분이 의문사항이 있거나 기타 조사와 관련한 질의를 하시고 그에 대한 참고인의 답변을 듣는 방법으로 회의를 진행 하겠습니다. 먼저 김찬제유허비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겠습니다. 유허비의 폐기를 주장하는 참고인을 모시겠습니다. 참고인께서는 답변석에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에 앞서 항상 저희 양평군의회 발전을 위해 바쁘신 가운데에 조언과 질책을 해 주시고 또한 바쁘신 중에도 본 특별위원회에 출석해 주신 종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참고인께서 이 자리에 오신 사유는 김찬제 유허비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함입니다.

김영구의장

아닙니다. 을미의병입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을미의병부터요?

김영구의장

아 지금 이 선생님은 을미의병 때문에 출석하신 분입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오늘 참고인께서 자리해 주신 사유는 을미의병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영구의장

위원장님! 발언권을 주시면 한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예.

김영구의장

고맙습니다. 저희가 선생님을 참고인으로 모신 것은 을미의병기념비문 내용 중 앞부분 쪽에 어떠한 내용이 있느냐 하면 「왜적은 시랑과 같은 야만성으로 들어내어 고의로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병탄을 목적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김홍집, 정병하 등 간적을 사주하며 내정을 간섭하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당시의 위정척사 정신으로만 보았을 경우에는 이 김옥균 등 정병하 이런 개화당 인물들이 간적으로 되는지의 사실은 당시 살아보지를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저희 의회 위원님들이 듣고 있기로는 김옥균, 박영효 등 유길준 이분들은 선각자로 학생들한테 지금 지도되고 있다. 또한 박영효 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 태극기를, 국기를 제일 먼저 만들은 사람으로서 학생들 시험에 까지 나오면서 지금 이 개화당 사실 이 개화파들을 우리나라의 선각자로 조명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러한지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선생님께 이것을 한번 묻고자 합니다.
고인

참고인

박양례 말씀하신대로 개화당에 대해서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저희가 보고 있거든요. 오히려 위정척사운동은 “주권을 지키자. 민족정신을 지키자 했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그렇지만 오히려 그분들은 그들의 어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운동을 추진한 것으로 부정적인 측면도 많은 것으로 교과서에도 설명이 되어 있고 저희들은 그렇게 보고 있거든요.

김영구의장

지금 말씀은 당시에 이 위정척사정신, 위정척사론 또한 바로 전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대원군의 쇄국정책론 결국 이런 것은 우리의 것을 좀 너무 아집하는 그런 경우로 해서 근대사의 발전을 퇴보시켰다는 그런 지금 조명이 되고 있죠?
고인

참고인

박양례 예, 예.

김영구의장

그리고 분명히 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김홍집, 정병하 등 이 개화파는 민족의 선각자들이라는 그런 지도를 하고 계시죠?
고인

참고인

박양례 예, 예.

김영구의장

사실 선생님들께는 이것에 관한 것만 저희가 이렇게 어떤 증빙되는 발언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위원장님! 다른 또 질의가 있으신 의원님들 질의하시죠.
영호

이영호위원장

질의하실 위원님 계시면 질의하십시오.

김영구의장

국사선생님이시니까 혹시 이 외에 을미의병기념비문을 보셨는지는 몰라도 이것에 대해서 어떤 견해나...
고인

참고인

박양례 저도 어제 처음 이걸 봤어요. 이쪽 기술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김영구의장

혹시 여기에 연고는 있으십니까? 양평에. 지금 현재 직업 그러니까 교직 때문에 계시는겁니까? 아니면 양평에 적을 뒀다거나 그 외에 무슨 연고가 있으십니까?
고인

참고인

박양례 교직 때문에 여기와서 살고있는 거거든요.

고기섭위원

제가 한번 물어봐도 될까요?
고인

참고인

박양례 예.

고기섭위원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비문내용에 좀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어떤게 문제점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실 수,
고인

참고인

박양례 아까 여기 김영구의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까 여기 개화당에 대해서 「간적을 사주하여」 이런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고기섭위원

그 내용만요?
고인

참고인

박양례 예.

고기섭위원

그 비문 내용중에 좀 짚을 수 있는 부분들이 있으시다면은요,
고인

참고인

박양례 제가 사실 이게 공문을 받으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제가 참고인으로 출석하는지를 몰랐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비문을 잘 읽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을 하기를 바랐다면은 좀 더 자세히 읽어봤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는 못했거든요. 그런데 읽으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아까 지적하신 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기섭위원

그런데 이게 왜 선생님까지 여기 모시게 됐냐면요, 사실 양평군의 역사에 문제가 있거든요. 후대들에게 물려줄 역사를 남겨놓는데 선생님들이 옛날서부터 파에 의해서 사실 충신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충신이 되는 그런 내용들이 지금에 와서 많이 달라졌단 말입니다. 그랬을 때 이 비문내용에 문제점이 있으면은 좀 짚어주신다면은 그게 참고가 될까 해 가지고 그래서 선생님을 모셨으니까 조금 관심있게 짚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고인

참고인

박양례 특히나, 다른 부분은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고요, 단지 이 문제 때문에 저를 참고인으로 부르셨다면은 다시 학교에 돌아가서 잘 검토한 다음 다시한번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박선배위원

제가 한가지만 여쭤볼께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박선배위원님 질의해 주십시오.

박선배위원

지금 현재 아까 의장님도 말씀하시고 선생님도 그 부분이 잘못됐다고 말씀하셨는데 현재 조선말기 그때 당시에 위정척사라는 것은 그때에는 유효했던 문구 아닙니까?
고인

참고인

박양례 그 시기에 있어서는 필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박선배위원

지금 시대가 바뀌어서 이 양반들이 나중에 참 우리나라를 위해서 모든걸 바로 갔다 이렇게 인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라고 해도 그때에 현실의 정치상황으로는 그게 어느정도 맞지 않았느냐 하는,
고인

참고인

박양례 예, 긍정적인 측면도 물론 있다고 교과서에도 쓰여있고 저도 믿고 있거든요. 위정척사사상을 우리가 계승할 부분은 많이 있어요. 있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분들이 정말 국가발전, 사회발전을 위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을 했다면 어떤 이미 그 때에는 청나라나 일본이 외국하고 외교관계를 맺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그분들도 알고 계셨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우리한테 필요한 일이라는 걸. 그런데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서 그러니까 나라를 지키자는 면은 높이 평가할만 하지만 좀 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체제유지를 통해서 그 분들이 어떤 권리를 오히려 지키기 위해서 그 분들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고 있어요.

박선배위원

그런데 지금 제가 생각하기에는 을미의병 이 문제가 된게 비문에 잘못됐다,
고인

참고인

박양례 예, 이것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보거든요.

박선배위원

이것을 쓴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소신껏 썼고 나중에 보는 입장에서는 지금 현실에 맞추어서는 이게 잘못됐다 이래서,
고인

참고인

박양례 학생들이 만약에,

박선배위원

양론의 시비가 걸려서 이런 저걸하는데 선생님이 아까 이 비문을 대충 읽어보셨다고 그랬는데 읽어보셨다면 선생님께서 판단하는걸로는 이건 뭐 큰 저건 없으니까 어떤 부분이 잘못됐고 어떤 부분은 잘됐고 어떤 부분이 잘못됐다고 꼬집어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고인

참고인

박양례 아까 말씀드렸지만 김옥균 이분들을 간적이라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이건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 다음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이렇게 좀 더 자세하게 읽어보고서 문제점이 더 있는지는 제가 아직 시간을 가져야지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선배위원

이상입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질의하실 위원님 안 계십니까? 예, 수고하셨습니다.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을미의병 문안이 좀 말이 잘못됐다 하는 임종선 선생님을 모시고 질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참고인의 의견진술이 끝난 후 본위원님들의 질의에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간략한 본인 소개와 더불어 을미의병 기념비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없습니다」하는 위원 있음

고인

참고인

임종선 감사합니다. 임종선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 자리에서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잘못된 역사 김찬제 독립애국지사 사건, 지평 을미의병기념비문 역사 왜곡사건을 바로 잡고자 추진해 온 것이 1995년 6월 5일부터입니다. 만 4년 6개월째로 접어들어 습니다. 다행한 것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양평군 지방의회가 조사특위를 구성하여 이 자리를 만들어 참고인 자격으로 존경하는 의장님과 위원여러분과 자리를 같이 해서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말씀드리기 이전에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말씀도중 가끔씩 제가 언어장애가 올 때가 있습니다. 또 이가 좀 빠져서 말이 헛나올 때도 있습니다. 발음이 정확하지 못합니다. 이 점 양해를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을미의병기념비 잘못된 부분을 제가 말씀드리고, 제가 말씀드릴 부분이 있고 그리고 방홍규선생님께서 말씀드릴 부분이 있고 그 다음에 안금식선생님께서 말씀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릴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랑줄로 제가 표시를 했습니다, 비문에. 「퇴앙 안종응과 하사, 괴은, 김사정, 김용준의사가 모의하여 괴은이 김백선을 설득하고」라는 부분이 잘못된 겁니다. 뒤에 제가 첨부를 시켜드렸습니다마는 독립운동사 사료집 제1집 종의록에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은 1989년 양평 백운문화지 6호를 보나 1992년 백운문화지 제9호를 보나 이것은 잘못 기록이 됐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춘영씨가 퇴앙 안종응씨를 찾아갔을 때 퇴앙 안종응씨가 이춘영씨를 김백선이를 만나라고 해서 김백선이를 그날 밤으로 만나가지고 김백선이한테 그 뜻을 전하자 크게 반갑게 하면서 의병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퇴앙 안종응과 하사, 괴은, 김사정, 김용준의사는 모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두 번째로 「하사는 순흥인이니 병자절신 안광욱」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병자절신이 아닙니다. 병자호란 때에 이 분은 이미 명신으로 칭호를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현대에 와서 병자절신이라고 한 것은 표기가, 기술이 잘못됐다. 제가 알기로는 병자절신은 나라에 충성을 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서 목숨을 바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있다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문건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 「군령을 위반한 장졸 김백선, 오장문, 유난형 등은 처형하였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것을 제가 왜 말씀을 드리냐 하면 어느 책이든지 어느 문헌이든지 김백선 선봉장, 김백선장군, 김백선선생으로 표기가 되어 있지 장졸이라고는 이게 표현이 안됐습니다. 비문에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우리 후손들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대하는 그러한, 이렇게 대해서는 안되겠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기념비라면 김백선씨가 군율을 위반해서 처형을 당했다 하더라도 기념비라면은 처형을 당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렇다면은 이분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서 국가가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럼 훈장을 수여했다고 기록을 해 줘야 될 것 아닙니까? 이 란이 모자라서 그랬다는 것은 이건 말이 안됩니다. 왜 안되느냐 하면은 있다가 여기 나옵니다마는 여기 한번 이걸 보세요. 비문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비문을 읽어보면은 이것은 그 당시에 화서선생의 척사운동에 의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고 하지마는 이걸 까놓고 보면 절대적으로 이게 지평을미의병기념비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는 것을 제가 말씀을 드리고 여기에 보면은 안승우씨는 안광욱씨의 9대손이니 절신이니 이렇게 왜곡을 시켜가지고 만들어놨고 또 이춘영씨는 몇대손이니 기록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김백선은 단 여기에 그렇게 나왔습니다. 「김백선도 지평사람이되 의리와 기개가 있어 괴은을 따라 동참하였다」 이 문구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처형이라는 문구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기념비냐 하는 것은 여러 위원님들께서 잘 평가를 해서 생각을 해 주시기를 부탁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양혜석문화원장 글을 청하니” 이겁니다. 어쨌든 혈세가 50만원이 작든, 크든 들어 간겁니다. 그리고 유지들한테 성금을 받았든 찬조금을 받았든 500여만원이 투자 됐습니다. 그렇다면은 양평문화원이 글을 청하니 이렇게 되면은 말씀을 안 드립니다. 그러나 양혜석이라는 이름을 넣었다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왜 잘못 됐느냐 하면은 이 앞서에 김찬제면장을 독립애국지사니, 그다음에 향토애국지사니 이렇게 해 가지고 이 양반이 ’99년 3월 10일 10시에 양평문화원 제16차 총회에서 다시 비를 세우느니 운운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는 중요한 것은 김찬제씨가 여기에 독립사료집 3.1운동 재판기록에 나옵니다. 왜경에게 공수를 했습니다. 만세를 부르라고 해서 만세를 부르지 않고 해서 군중이 끌어다가 했습니다. 그래도 만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애국지사가 됩니까? 기록이 있습니다. 김찬제가 이러한 기록이 있다는 것은 나는 양평 전문화원장 양혜석이 그 분이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은폐를 숨긴 것 그것 뿐일 겁니다. 이렇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제 말씀은 이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질문을 해 주시면 제가 답변을 하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질의하실 위원님 계십니까?

김영구의장

발언권 주시겠습니까?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예.

김영구의장

고맙습니다, 위원장님. 지금 임선생님께서는 이 비문이 잘못 됐다는 것을 현재 지금 네가지를 말씀 하셨습니다. 퇴앙과 하사, 괴은, 김사정, 김용준의 모의는 거짓이다. 근거없는 얘기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또 안광욱 병자절신이라는 것은 이것도 거짓이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또 김백선, 오장문, 유난형 처형을 이렇게 기록하여서는 아니된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그리고 또 하나가 있네요. 괴은을 “김백선도 지평사람인데 의리와 기개가 있어 괴은을 따라 동참하였다.” 이 동참이라는 문구도 조금 고쳐야 되지 않겠느냐?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아니, 그건 아니구요. 이 안승우...

김영구의장

좋습니다. 하나하나에 대해서 다시 묻겠습니다. 또 양혜석원장의 이름이 비문에 거명 된 것은 많은 문제가 있지 않았느냐 이것 이었는데 우선 하나 맨처음 “퇴앙과 하사, 괴은, 김사정, 김용준의 모의는 거짓이다” 이렇게 하셨는데 퇴앙, 하사 그러니까 독립운동사 사료나 또는 여타한 종의록이나 이런 사료로 봤을 때 안종응 결국 퇴앙과 괴은 이춘영이 밀모한 사실은 인정 하십니까, 두분이?
고인

참고인

임종선 두분이, 예 인정을 합니다.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안종응, 이춘영이 모의를 한 것은 사실은 인정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렇지요, 예, 예.

김영구의장

또 안종응과 안승우가 모의한 사실은 또 인정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지평의병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김영구의장

안종응과 안승우가 밀모한 사실은 인정하지 않습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그런데 독립운동사 사료집 1권 종의록 18쪽에 거기서부터 또 이부영씨가 지은 호서의병사적수서원 1993년도에 지은 250쪽의 안종응과 안승우 결국 부자지간입니다. 부자지간에 모의를 했다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모의를 지평, 그당시에 말이지요 이춘영이가 안종우씨를 찾아가서 했을 적에 퇴앙 안종응씨가 김백선이를...

김영구의장

지금 다섯분을 모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첫째 안종응과 이춘영이 모의를 한 사실은 인정을 하셨지요?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렇지요.

김영구의장

두 번째 안종응과 안승우는 부자지간입니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부자지간에도 이런 모의를 했다고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건 모르겠습니다.

김영구의장

인정하시지요?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그다음에 안승우와 김사정의 밀모는 인정 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거 인정을 않습니다.

김영구의장

그렇다면은 독립운동사 사료집 391쪽에 “안승우가 지평에서 원주로 들어 간 것은 이 김사정이 권고에 따른 것이다”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그렇다면은 이 독립운동사 사료집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아니 부정은 아닌데요, 비문에 기록된 지평 을미의병에 관해서는 그분네들을 인정을 안 한다는 얘기지요.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지평을미의병에서는요?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그러나 의병을 모의한 사실은, 우리 지평을미의병을 빼놓고 당시에 다른 의병을 해야 되겠다, 거병을 해야 되겠다는 밀모를 했던 사실은 이 사료집은 인정을 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아, 인정을 하지요.

김영구의장

좋습니다, 그러면 다 같은 얘기인데. 결국 그렇다면은 이분이 지평 을미의병에는 무슨 김사정이나 이런 사람들이 모의한 사실은 인정치는 않지만 다른 의병을 거병할 뜻을 가졌다는 사실은 인정하신다 이거지요?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아, 인정하지요.

김영구의장

좋습니다. 또 두 번째에 안광욱이 병자절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병자절신 이 문제로 비문을 작성하신 장삼현교수와 상당히 언쟁이 있으셨던걸로 알고 있는데 그 분은 이 절신을 유권해석하기 나름이다. 절신이라는 것은 꼭 죽어서 사절신이래야 절신은 아니고 절개있는 신하도 절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문구에 대해서도 상당히 반박을 많이 하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여러 학자들 장교수께서도 여러학자들한테 절신의 유권해석을 요구했을 적에 절개있는 신하라는 뜻도 가당하다 이렇게 된걸로 알고 있는데 여태까지도 그 절신에 대해서 그렇게 인정이 안 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인정을 할 수가 없지요. 왜 그러냐 하면은 절신이라는 얘기는 국어사전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김영구의장

국어사전에 없는 말은 여러개가 있습니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없는데요, 이게 가장 중요한게 뭐냐 하면은 말이지요 효종 4년 1653년 3월 3일 기사년에 여기 조선왕조실록에 있습니다마는 청원감사를 안광욱씨가 하다가 파직된 경험이 있지요. 그럼 임진왜란이 언제 일어났냐? 1616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1659년 5월까지 된걸로 알고 있거든요. 이 안에 일어났던 사항이거든요. 그런데 그당시에 명신이라고 이미 붙여져 있습니다, 이분한테. 그런데 오늘의 작금에 와 가지고 절신이라고 붙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 이거지요.

김영구의장

그런데 혹시 절신과 명신이라는 말을 놓고 볼적에 어느 것이 사실상 더 높은 의미의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명신은요, 명신은...
영호

이영호위원장

저기 임선생님 잠깐만요, 안금식선생님하고 방홍규선생님도 같이 답변석에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맥락에서 답변을 하시겠다고 하니까 세분 같이 답변 하시지요.

김영구의장

세분이 인정하신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임선생님 인정 하시지요, 같은 맥락이시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어느 충신이 한분 있었는데 그분을 명신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그분에 대한 우대를 하는 것인가, 절신이라고 표기를 하는 것이 더 우대를 하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고인

참고인

안금식 그건 제가 답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김영구의장

예.
고인

참고인

안금식 제가 유인물 정성들여 못 했습니다마는 연락을 늦게 받아 가지고, 이 자리에 저희가 비문에 대해서 위원님들께 답변을 드리는데 있어서 저는 우선 장삼현교수님도 양평이 배출한 교수님이시기 때문에 혹여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그양반의 인격에 손상이 안 가기를 바라고요, 저도 장삼현 교수를 인간적으로는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평역사의 백년대계를 내다 볼 때는 냉철하게 판정해서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고 또 후학들에게도 올바른 산 역사를 남겨주어야 한다는 그런 책무감에서 소신껏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지금 우리 김위원님께서 말씀해 주신데 대해서 제가 부족하나마 보충적인 답변을 올리겠습니다. 명신이란건 제가 자료준비한데 그 설명이 있습니다. 여기 뒷장을 넘기면은 “하사는 순흥인이니 병자절신 안광욱의 9대손이며” 이렇게 나오는데요 이게 여기는 그냥 절신 안광욱의 9대손이며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마는이게 뭐냐 하면은 분명히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그 옆부분에 “벼슬은 이찬, 병자호란때에 명신의 9대손이다” 이렇게 돼 있는데 이 명신의 개념은 병자년에 오랑캐 난리때 울면서 통곡하면서 성밖으로 나갔다는 그런 개념이 명신이고, 절신앞에는 우리가 대방전을 보니까 죽을 사자 사자가 붙여 가지고 사절신 그러니까 통곡하면서 성밖을 나간 것이 아니고 목숨을 버린 분들입니다. 거기에 사절신 이렇게 붙이는건데 사자만 떼고 절신해 버리면 이 명신을 사절신으로 오도하기 쉽고, 충신으로써 울면서 성밖을 나갔다는 개념하고 귀한 목숨을 져 버려서 충성을 나라에 했다는 개념하고는 제가 생각할 때에는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에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렇게 답변을 올리겠습니다.

김영구의장

아니, 임선생님 말씀중에 이미 명신이라고 이조 왕조실록에도 거론이 돼 있는데 굳이 절신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셔서 절신과 명신의 차이 어느것이 그러니까 더 우대성이 있는 말씀인지?
고인

참고인

안금식 제가 말씀 올리는건요 명신으로 표기돼 있으면은 명신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는데 절신 이렇게 하면은 후대에 사학자들이나 이 고장에 머물러 살면서 역사를 관심깊게 보시는 분들이 볼적에 그 절신이라는 문맥 때문에 목숨을 져 버린, 울면서 성을 나간 그런 명신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고 목숨을 져 버린 사절신으로 오도하기 쉬운 이런 내용이기 때문에 좀 잘못된 부분이다 이렇게 생각이 돼 집니다.

김영구의장

지금 문제 제기된 절신에 관해서는 사절신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니 문제가 있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고인

참고인

안금식 예, 그렇습니다.

김영구의장

좋습니다. 그 다음에 김백선, 오장문, 유난형을 장졸로 표기하면서 처형했다는 내용이 김백선장군의 처형사실과 오장문, 유난형의 처형사실은 엄격히 틀리다라는 것도 제시한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러니까 김백선장군은 어쨌든간에 처형된 것은 사실입니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사실입니다.

김영구의장

군율을 위반한...
고인

참고인

방홍규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좀 답변 드리겠습니다.

김영구의장

아니, 우선 임선생님...
고인

참고인

방홍규 제가 답변 드리겠습니다.

김영구의장

좋습니다.
고인

참고인

방홍규 장삼현교수님도 아마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계실겁니다. 역사적 사실을 갖다 기록한 것이다. 왜? 기록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해요. 사실과 사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종이가 없어서 여기서 좀...

김영구의장

결국 이렇게 말씀하셔도 되겠네요. 그 사정과...
고인

참고인

방홍규 아니 이 사실(사실)과 역사의 사실(사실)을 이걸 구분하는 것이 역사학도로써의 초보적 지식입니다. 하면 김백선이라는 분은 우리가 의병비를 세울적에, 나도 문화원에 그때 관계를 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또 장삼현교수와 함께 양평의병을 같이 썼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역사비를 세울적에 우리는 역사의 굴곡을 바로잡고 민족의 정기를 일으키기 위해서 이것을 세운 겁니다. 하면 역사의 사실을 갖다가 규명하기 위해서는 사안이 필요합니다. 사안이란 역사를 볼줄 아는 눈 그것이 필요합니다. 김백선은 보국훈장까지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냥 추천으로 인해 가지고 주는 것 아닙니다. 보훈처에 가서 알아 봤습니다. 국내에 저명한 학자 이분들의 심사를 거쳐 가지고서 훈장을 준다고 했습니다. 하면 사안을 거친 분이예요. 애국지사로써 모셔오고 있습니다. 그런 분인데 그분의 비를 애국적 지사로다가 표현해야지 구태여 이렇게 까지 표현할 수가 있느냐?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이것을 반증했을 적에는 그양반들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마는 사실과 사실을 구분하는게 이것이 초보적 지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쳤기 때문에, 사안을 거쳤기 때문에 이분을 애국지사로써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나는 애초부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한가지 예를 들지요. 여러분은 장택상이라면 아실는지 모르겠어요. 경찰청장까지 지내 잡수고, 또 국무총리까지 지내 잡수신 분입니다. 그분의 아버지가 장승엽이예요. 장승엽이를 독립기념관에서도 지금 친일파로 몰았습니다. 그런데 친일파로 몰다 보니까 국사편찬위원장 이름을 잠깐 잊어먹었습니다마는 건국대학교 교수 박모교수 이양반들이 다 옷을 벗게 됐어요. 재판을 했기 때문에. 이유는 장삼현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역사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춘영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는 모의하기 위해서 김세기라는 양반을 찾아 갔습니다, 연암 김씨입니다, 안창에 사시는 분인데. 그양반을 찾아가 가지고 의병을 일으킬테니까 군자금을 대라 하니까는 이 양반이 그것을 중앙에다가 고비를 했어요. 그래 가지고 토벌군, 관군에서 얘기할 때는 토벌이라고 그러겠지요, 그것이 오게끔 돼 있는데 그 김세기가 그 공로로다가 경상도 관찰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장승엽이라는 양반은 워낙 부하기 때문에 당시에 참판 허유선생을 찾아 갔어요. 허유선생이라면 후기의병에 군사를 지내 잡수시던 분이십니다. 허유선생을 찾아 가셔 가지고 나는 돈은 얼마든지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은 관찰사를 하고 싶다. 허유선생은 당시에 의병을 지원하시던 분이기 때문에 김세기가 관찰사로 있기 때문에 그사람을 파직시키고 장승엽이를 관찰사를 시켰어요. 여러분들이 아실는지 모르지만 광복회라는게 있습니다. 박상진이라는 양반이예요. 이 양반은 경상도에서 큰 풍우였습니다. 보통 풍우가 아니예요. 그분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중에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가 자식의 축문을 쥘 그런 사실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들이 그 내막을 알기 때문에 장승엽이한테 가서 당신이 당시에 돈을 낼려고 들던 그 돈을 우리 독립운동에 쓸테니까 내 놓으시오 하니까 일본경찰에다가 일렀어요, 헌병대에다가. 그래 가지고 그 양반들이 처결을 당했습니다. 처결을 당하니까 광복회에서 나와 가지고 그 양반을 죽였어요, 장승엽이를. 그 시가 저한테 있습니다, 지금. 그랬는데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다 했는데 그 교수들은 장택상이의 딸이 미국서 살다가 와 가지고 너무 억울하다 해 가지고 재판을 해 가지고 그 양반은 도리어 박교수 이 양반들이 친일파로 몰았다 해 가지고 명예훼손으로 해 가지고 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얘기를 장삼현교수님한테도 말씀을 드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지워달라. 그러니까 그 양반 한줄도 지울 수가 없다고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나온 것은 김백선에 대해서 그런 말씀 드릴려고 나왔습니다. 또한 이것은 질문에 없는 것인데 아까 위정척사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학자들 신용학교수 서울대학교 나 이름은 다 외우지는 못합니다만 박사학위 논문을 제가 많이 의병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많은걸 갖다 놨습니다. 학위 논문을 가져왔습니다. 의병사에 대해서도 학회에서는 대단한걸로다 민족정기를 위해서 이것이 필요하다 해 가지고서 지금 학위를 주고 있어요. 박사학위가 많이 나왔습니다. 특히 박사학위가 제일 많이 나온게 지평의병을 기간으로 한 제천의병입니다. 논문을 보시기 위해서 청하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그 논문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한 5, 6권 됩니다. 거기에 위정척사 안 들어간게 없어요. 중식선생은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은 “위정척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주체적 사상이다” 당시에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왜놈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위정척사 사상없이는 의리정신 없이는 안됐습니다. 그 철학이 있었어요. 그 정신이 철학이 됐습니다. 철학을 이행한 것이 의병장들입니다. 한 예를 보죠. 남한산성에서 김하락 의병진들이 연합전선이 투쟁을 했습니다. 거기에는 1년간을 먹고 저항할 수 있는 양식이 있었고 무기가 있었어요. 병력은 1만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무너졌어요. 왜? 위정척사 사상이 결여된 사람들이 의병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양반들을 김기성이라는 양반은 의병장인데 수원 유수를 시켜준다는 바람에 거기에 넘어가가지고 일본군을 끌어들였고, 박중용이라는 양반은 광주 유수를 시켜준다는 바람에 나갔습니다. 거기에 비해 가지고 안승우선생은 총에 맞아서 항쟁하는데 장기렴이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너는 살려 주겠다. 우리에게는 묘약이 있기 때문에 고칠 수 있으니까 항복만 해라” 듣지 않고 되려 호령을 하고 거기서 순절을 했습니다. 거기에 차이가 있는거예요. 위정척사 사상이라는 것은 뭐고 나는 깊이는 모릅니다. 하나 오늘의 역사학자들은 위정척사는 많은 논조를 논리적으로다가 그것을 표현하고 있어요. 여기 장삼현교수님이 이 비 세운 데도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위정척사 사상을 갖다 강조하다 보니까는 김백선도 처형하게 된 것이고 이러한 문안이 되어 있는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이해도 해 봅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 있으시다면 나는 논리적인 얘기는 못하겠어요. 그런데 한가지 말씀을 드린다면 위원님 앞에서는 왜 그런지 떨립니다. 나는 미군관계를 많이 하고 있어요. 한미연합사 사령관 앞에서도 연설을 했던 사람이예요. 장성이 자그만치 23명이예요. 그 앞에서도 연설할 적에 떨리지 않았어요. 조리있게도 얘기했어요. ’96년에 7군단에서 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이 와가지고서 연설해 달라고 할 적에도 떨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위원님 앞에서는 떨리네요. 죄송스럽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수고 하셨습니다.

박선배위원

제가 한가지만 여쭤볼께요.
고인

참고인

방홍규 예

박선배위원

여기 문화원장님도 와 계시고 저희 위원님들이 저를 비롯해서 이런 사학에 다소 상당히 부족합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다 양평을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많이 공헌을 해 주시고 또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뜻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한가지 궁금한 것은 장삼현교수가 을미의병의 그런 비문을 썼는데 그때 당시에 문화원에 아까 임종선씨가 말씀하신대로 문화원 양혜석씨가 청해서 글을 썼다 이렇게 뒷부분에 되어 있다 이 말이예요. 그러면 주체가 문화원에서 해서 모든걸 했으면 양혜석원장이 장삼현교수한테 비문을 의뢰해서 장삼현교수가 비문을 써가지고 왔을거랍니다, 이것을. 써가지고 왔으면은 문화원에서 원장님을 비롯해서 거기 운영위원이나 이사님들이 그 비문을 검토를 해서 확실한 규정을 지어가지고 검토를 해서 비문작업에 들어갔을거라고 봅니다. 그러면 여기 계신 분들이 다 그때에 문화원에 참여하시고 또 우리 임종선씨 같은 분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분인데 그때에 어떻게 이 비문이 시정이 되지 않고 원문 장삼현씨가 비문을 쓴 원문 그대로 비문에 새겨질 수 있느냐 이게 가장 궁금한 문제중에 저는 한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고인

참고인

방홍규 애초에 이 비를 세울 적에는 추진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했었습니다. 거기에 저도 일원이었었습니다. 왜냐 하면은 이 의병사에 대해서는 조금 제가 아는게 있기 때문에. 그래 장삼현교수님께서 써가지고 온 것을 보니까는 마땅치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이의를 제기했어요, 여러분들이. 특히 양동에 계신 안삼복선생님도 반대를 하시고. 그러니까 장삼현교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나는 여기서 일부라도 난 고칠 수가 없다. 한 자라도 고칠 수가 없다” 그런 말씀을 하셨었어요. 그래 그 날은 그냥, 그렇다면은 양원장님께서 저렇게 한 자도 못고친다고 한다니까는 날보고 “너도 좀 써라” 그런 말씀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흘르다가 보니까는 이사회까지 이게 통과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선배위원

그럼...
고인

참고인

방홍규 나중에요. 그 날은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래 이사회에 할 적에 제가 못나갔어요, 그 때는. 장삼현교수님도 양평을 위해서 많은 헌신을 하시는 분이니까 이사님들도 읽어보니까 별다른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통과가 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이게 서게 되고 말썽이 있으니까 다시 회의를 소집했어요, 양원장님이. 그래서 제가 나가가지고 김백선에 대해서만 난 다른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김백선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했었어요, 그날. “그러면 그것을 지우면 되느냐?” 이렇게 까지 말이 나와가지고 “그럼 나 지워달라” 그런데 그게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거죠. 그래서 실질적으로 여기서 이것을 다룬다는, 여기 문화원장님도 계시지마는 문화원에서 이사회에서 통과되어 가지고 선거라면은 다시 이의가 없어야죠.

박선배위원

그러게 말이예요.
고인

참고인

방홍규 반대하는 분들은 반대고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글이고 간에 비판 안하는 글이 어디 있습니까?

박선배위원

그런데 지금 좋은 말씀 들었는데 제가 지금 장삼현이가 서종 사람입니다.
고인

참고인

방홍규 예, 알고 있습니다.

박선배위원

제 이웃에 있고 상당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장삼현교수도 의장님도 한번 만나 뵙고 저도 한번 만나서 이 문제를 가지고 얘기를 한번 해 봤습니다. 그래서 아까 고등학교 선생님이 왔을때도 위정척사 그러니까 시대의 글이라는 것은 변화가 있는거란 말이죠.
고인

참고인

방홍규 위정척사도 시대에 변전에 따라가지고 변했습니다.

박선배위원

그렇지요. 그런데 지금 저희가 좁은 소견에 생각을 해 보면 좀 더 이 글이 원만하게 됐더라면 그때 시대에는 그랬어도 지금에 가서 김백선씨가 나중에 해서 훈장까지 받은 입장에서 좀 더 글을 묘사해서 가미를 했다면 그 후에 조금 해서 후한 점수로 딱 치켜서 이렇게 해서 해 줬으면은 오죽 좋았겠느냐. 그런데 여기 싣는걸로 보면 얘기를 들으면 이것은 전부 전체가 이항로선생을 한 그 비라고 인정을 할 수 있지 김백선이를 위한 비라고 할 수 있느냐 여기서부터 이게 문제가 시작이 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삼현교수 보러 물어보니까 “김백선씨라는 의병의 주체를 캐다 보니까 이 이항로선생의 그 의지와 후학적으로 해서 이런 의병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걸 쓰기 위해서는 이항로선생을 안 쓸 수가 없지 않느냐?” 이래서 이게 기재가 된거다 이런 얘기란 말이예요. 그 양반의 얘기를,

김영구의장

저 박선배위원님 잠깐만요.

박선배위원

예.

김영구의장

사실 지금 임종선선생님 반론한 김백선 처형에 관한 문제로 지금 얘기가 진행되다가 또 김백선 처형에 대해서 좀 답변을 하시겠다고 방선생님이 하시면서 사실(사실)과 또 사실(사실)을 잘 봐야 된다 이렇게 되면서 너무 장황하게 얘기가 되어서 지금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데요, 김백선장군 처형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다고 하는 것이 지금 이상하게 갔습니다.
고인

참고인

방홍규 그러기 때문에 제가 그 말씀을 드리겠어요.

김영구의장

어떤 사실(사실)과 사실(사실)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되는지 그걸 참고인으로 오셨으면 참고적으로 말씀을 해 주셔야 되는데 지금 저희는 어떠 어떤걸 구별하라고 하는지를 알아 듣지를 못하겠습니다.
고인

참고인

안금식 위원장님! 저한테 발언권 주시겠습니까?
영호

이영호위원장

10분 휴식을 하신 후에 답변을 하시죠. 휴식을 위해서 10분간 정회를 하겠습니다. 정회를 선포합니다.

11시00분 회의중지

11시12분 계속개의

성원이 되었으므로 회의를 속개 하겠습니다. 안선생님께서는 아까 질의한 내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요, 저희 위원님들이 질문하시는 답변만 해 주시고 타 말씀하실 사항은 시간이 있으실때 좋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고인

참고인

안금식 김영구의장님이 아까 말씀해 주신 것에 보충답변을 올릴려고 그럽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답변해 주시죠.
고인

참고인

안금식 아주 우리 김영구의장님께서 그냥 해박하게 연구를 엄청 많이 하셨습니다. 발언할 때는 제가 뒤에 앉아 있었는데 참 “너무나도 연구하고 준비를 참 많이 하셨구나!” 하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말씀을 올려야 할 것은 「적당이 오기를 기다리던 퇴앙 안종응과 하사, 김사정, 김용준의사가 모의하여」에 대해서 아까 김사정씨가 지평의병에 참여한게 사실이고요, 또 하사 안승우씨한테 원주로 들어가시라는 기록이 분명히 나오는데 그 날짜가 기사일 4일입니다. 기사일 4일의 날짜는 지평의병이 안창에서 창의한 두달후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모의를 하는데 동참했다는 얘기하고 김사정씨께서 안하사 보고 “원주로 들어가시오” 한 얘기하고는 이게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관점은 모의하는데 김사정씨가 창의한 역사적인 기록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관점은 이것인데 왜 이 사안이 중요하냐면은 물론 우리가 이춘영의병장의 처가댁이 되는 인목대비의 친정이기도 한 연암김씨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처가집이 되기 때문에. 우선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조금 보고말씀 겸해서 드려야 할 것은 저희가 “역사성이라는 것은 현장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의향지편찬위원회 위원님들 여덟분들이 7박8일에 걸쳐서 지평의병 행적지 이철기 현장을 탐방을 했습니다. 이철기를 탐방을 하고 나니까 저희도 윤곽이 좀 잡혔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의 문제하고는 별개입니다마는 장삼현교수님이 책을 쓰시는데 현장을 탐방 안하셨기 때문에 제천의 남산전투에서 안승우씨가 전사하셨는데 이 가웅전투에서 전사한걸로 이 책에 그렇게 서술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다릅니다. 이게 올바르게 어떤 역사성을 갖고 비문을 작성하셨으면은 오류가 없을텐데 이게 그런 현장을 답사 안하고서 했기 때문에 오류가 나오지 않나 이렇게 이해가 되어지면서도 아까 김영구의장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답변을 드리면서 이 분야가 김사정씨가 모의에 가담했느냐 안했느냐가 왜 중요한가 하면은 저는 이런 관점으로 생각을 해 봅니다. 김사정씨가 모의에 가담을 했다 한다면은 지평의병의 창의는 원주사람이 일견 한켠에서 진두지휘하는데 참여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우리 넓은 의미에서 양평의병 지금은 지평, 양근이 합쳐서 양평이 됐으니까 순수한 양평의병 창의, 옛날 역사속으로 말하면 지평의병 창의입니다. 지평의병의 창의가 우리 양평사람들이 주도한게 아니라 원주사람들로 개진됐다는 오류가 나오기 때문에 저는 이걸 냉철하게 구분하고 가자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동안에 정신문화원 또 국립도서관 또 국회도서관 수차례 갔다 왔습니다. 이것은 역사는 바탕을 갖고 가야 되는데 이게 그 어디에서도 김사정씨가 모의에 가담했다는 기록근거를 사료에서 찾아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저는 오류라고 생각을 하고요, 또 분명히 비문에 장삼현교수가 남기시기를 「적당이 오기를 기다리던 퇴앙 안종응과」 안종응과로 시작됐습니다. 「안종응과 하사, 괴은, 김사정, 김용준」 이렇게 될 때 퇴앙 안종응과 김사정이 만난 근거가 있느냐 이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없다면 잘못된게 아니냐 그런 시각을 갖고 이걸 말씀을 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또하나 기왕 말씀 올리는 김에 제가 준비한 자료에 첫머리가 있습니다. 맨 윗부분입니다. 거기 비문속에 나오는 것이 이런 귀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류인석선생이 제천 장담에서 문인사우들과 처변의 도리를 논의하였는데 하사 안승우, 괴은 이춘영 두의사는 거의소청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나오는데 저희는 장담에를 다녀왔습니다. 장담이 적어도 제천시내에서 30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지평의진이 안창에서 창의해 가지고 원주를 거쳐 제천에 들어갔었을 적에 이필희씨라든지 서상렬씨라든지 이런 분들이 제천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면은 장담으로 모인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30리라는 지역적인 오차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건 큰 오류입니다, 이게. 그래서 여기에서 큰 문제점이 또 뭐냐, 안승우씨는 종의록에 보면은 퇴앙 안종응씨가 그 계책을, 이건 뒷페이지에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만 뒷페이지에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 계책을 이춘영씨가 물었을 때 김백선을 만나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포군을 중심으로 지평에서 의병이 거의할 수 있는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어갈제 그 아들 승우를 부르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전에 퇴앙 안종응하고 아드님이신 하사 안승우씨하고도 의병을 하기 위한 어떤 계책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와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의병이 일어나게 된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 승우 아들을 부른 것만 기록에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승우하고 그 아버지 되는 퇴앙 안종응씨하고도 계책을 논의했다고는 볼 수가 없는 사안입니다. 여기서 또 그런데 왜 중요한가 하면은 우리는 이게 지평의병을 두고 역사속에 제천쪽에서는 우리 지평의병이 원주 안창에서 창의해 가지고 원주를 거쳐 제천에서 장협에 가서 싸움을 하게 됐습니다. 그 싸움을 할 때 원주나 제천에서 단 한사람의 병사도 발진 못했다는 기록을 105년 전에 안승우씨가 안하사 창의실기에 분명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천에 있는 세명대 구완회교수가 그 엄연히 그것은 지평의 군사들이기 때문에 지평의병 이렇게 표현해야 되는데 바야흐로 이것은 제천의병이 승전하는 찰라다 하고 제천의병으로 거기서부터 역사적으로 둔갑시켜 놓은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우리가 이것은 논쟁을 제천의 구완회교수하고도 벌여야 되고 또 이런 것을 공감하던 이창식교수님이 세명대에 계시는데 제가 항의를 했습니다, 전화로. 그래서 세명대교수가 “언제든지 불르면 여기 오겠다” 그래고 잘못 된거라고 세명대교수 이창식교수가 시인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첫 번째 구절중에서 “제천 장담에서 문인사우들과 처변의 도리를 논의 하였는데” 이 처변의 도리라는건 뭐냐하면은 여기 제가 책자를 아주 복사해서 붙였습니다. 첫 번에는 거의소청(거의소청), 거의소청은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소탕하자는 얘기고요. 두 번째 거지수구(거지수구), 국외에서 화맥의 개의를 홀로라도 지키자는 얘기고요. 또 세 번째는 자정치명(자정치명), 스스로 목숨을 끊음 이런건데 이 처변사가 논의가 됐지마는 그때 유인석씨는 의병을 일으키자는 쪽이 아니었고 중국으로 들어가자는 쪽 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문맥을 보면은 “장담에서 문인사후들과 처변의 도리를 논의 하였는데” 이렇게 하니까 마치 여기에 감각적으로 이 비문을 읽는 분은 유인석씨가 여기서 의병을 일으키자 하는걸로 논의 했는데 하사하고 괴은이춘영이가 따라줬다 하는 내용으로 돼 있는데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괴은 이춘영씨가 여기 기록에 맨 여기 말미에 이춘영의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에는 장담에 출입한 적이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거의소청에 동참해서 이춘영씨가 주장한걸로 돼 있거든요. 이건 제천쪽에서 저희는 지평의병 창의는 제일 처음에 저는 그런 시각으로 생각을 합니다. 퇴앙안종응씨하고 또 괴은이춘영씨하고 또 김백선씨하고 주역이 이 세분입니다. 왜 주역을 세분으로 봐야 되느냐 하면은 이 포군을 설득하는 과정에는 잘못 하면은 반대파가 있을 때 말한마디 잘못하면은 총뿌리를 겨누어서 쏴도 어디가서 항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목숨을 내걸고 포군을 설득하는 이런 분위기 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끼어 들은 것은 김백선하고 괴은이춘영이 입니다. 그러면 그때 하사안승우씨는 제천에 있었던겁니다. 의병을 다 거의해서 창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갖고 안창에 갔을 때 거기서 합류한게 안승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평의병의 주역은 퇴앙안종응, 또 괴은이춘영, 또 포군의 영수 김백선 이렇게 세사람으로 봐야 되고 이것은 제일 처음에는 그렇게 봅니다. 지금 제천쪽에서는 화서 이항노선생님이 출생지가 포천이라고 그래고 거기 유인석씨가 장담으로 이사와서 살았기 때문에 시원지를 거기라고 합니다. 원주, 화맥 이렇게 시원지를 따지면은 서종면 벽계가 시원지가 돼야 되는데 그 문헌속에서도 화서 이항노선생님은 양평분이라고 안 그러고 포천분이다 이렇게 하면서 퇴색을 시켜 가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비문에 옳게 잡아 지느냐, 안 잡아지느냐 하는 것은 밖으로 그런 문제에 자료를 엉뚱한 자료를 주느냐 안 주느냐 이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갈음이 분명히 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괴은이춘영씨가 있도 않았는데, 있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저는 이 자리를 빌어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아까 순위를 벗어나 말씀을 하셨지마는 역사적인 큰 안목은 우리 방홍규위원님이 대단히 갖고 계신 분입니다. 역사적인 흐림이나 안목을 저도 이 방홍규위원님한테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많이 가르침을 받고 도서관도 쫒아 다니고 하는데 성격이 급하셔서 표현은 잘 못 하시더라도 역사적인 큰 안목을 갖고 계십니다. 또 여기에도 장삼현교수가 만든 책에도 사료를 우리 방홍규선생이 많이 뒤받침 했다고 여기 기록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 방홍규선생님도 이춘영씨가 그때 장담에 출입 안 했다는 것은 정신문화원에 가서 명단까지 뽑아본 사실입니다. 아닌 것을 기인 것 처럼 돼 있는 것은 이것은 분명히 잘못돼 진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걸 우리가 그냥 넘어 간다면은 순수하게 목숨걸고 지평사람들이 의병 일으킨 것이 마치 장담에서 유인석씨나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계층쪽에서만 진두지해서 지평에서 그 진두지를 봐도 의병이 일어난냥 이렇게 됐는데 그건 아닙니다. 접목은 분명히 됐습니다. 그 접목이 어디서 됐는가 하면은 이춘영씨하고 서상렬씨하고 김백선씨가 주축이 되서 단양 장협에서 전투를 해 갖고 싸워서 이겼습니다. 대승했습니다. 대승을 했는데 그게 지평의 군사들 뿐이거든요. 이 책에 어떻게 표현했냐 하면은 대승을 한 전투를 대승했을 때는 제천의 의병이다 이렇게 표현을 해 놓고도 이 서론에다가는 “지평의병에 패하여 영월로 퇴군하고” 이렇게 세명대 구완회교수가 장닌질을 친 책이 바로 이책입니다. 그래 제가 제천문화원으로 항의를 하고 대승을 해서 분열이 되서 영월로 이동해 온걸 그걸 “패하여 퇴군하고”이렇게 한다면은 그건 왜 그렇게 했느냐, 지평의병의 맥락을 끊고 이것을 역사속에 제천의병으로 둔갑시켜 이끌어 가자니까 그렇게 장난질을 교수들이 친겁니다. 그래 저는 이것을 단언히 말씀 올리고 싶은 것은 그리고 이 비문속에 순위가 나오면은 하사 안승우, 그리고 뒤에 괴은 이춘영 이건 백번 잘못 된겁니다. 당연히 앞에는 누가 들어 가야 되냐 하면은 괴은 이춘영이 들어 가야 되고 또 지평의병을 얘기할 때는 책의 역사에 그렇게 기록이 돼 있는데 장삼현교수가 을미의병 기념비는 인용을 안 했는데 이 뒷면에 보면 말이지요 독립운동사 유한철 독립기념관에 독립운동사 연구소에 유한철연구관님이 이게 “유인석 사상과 의병”에 대한 책자에 순위를 이렇게 서술을 했습니다. 이게 이필희 의진지도부 구성 이게 지평의병입니다. 기록에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대장에 이필희, 중군에 이춘영, 선봉에 김백선, 군사에 서상렬, 군무도지사에 안승우” 안승우가 뒤에 가 있습니다. 이게 맞습니다. 왜 그러냐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 올린 것 처럼 이춘영, 김백선이 주역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그동안에 도서관을 쫒아 다니면서 정신문화연구원, 국립도서관 또 국회도서관 이렇게 쫒아 다니면서 사료를 많이 찾았습니다. 이춘영씨가 왜 또 앞에 가야 되는 당위성이 뭐냐 하면은 장위협전투를 하고 충주성을 치자고 했습니다, 서상렬씨가. 그런데 거기서 지평의병들이 밥도 제대로 못 먹고서 반대적인 견해가 일어나 갖고 분열이 돼 갖고 중령을 넘자, 중령을 넘었는데 넘으면서 이필희 대장을 죽이자 이래서 이필희대장은 지휘권을 이춘영씨한테 넘기고 안동쪽으로 가시고 그리고 이춘영의병대장이 지평의병을 지휘하면서 순흥에 가게 됐습니다. 순흥에 가 갖고 이 찾은 문건은 뭐냐 하면은 이춘영 의병대장이 거기서 정식으로다 이춘영 복위대장, 대장으로 정식으로다 추대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장충식일기 처의록에 나오는건데 이게 제천에서 이구형선생님이 번역을 하시면서 문화원에서 책을 만드는데 그 사료는 다 번역을 하면서도 이 장충식일기는 번역을 안 했습니다. 이건 왜 안 했느냐? 이게 우리 양평에서 해야 됩니다, 이제. 양평에 유력한 기록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걸 안 했습니다. 이것만 홀랑 빼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편찬위원회 할 때도 강력하게 제가 제창을 하면서 우리가 제천에서 번역 안 한 것은 이 장충식일기는 우리가 번역을 해야 한다. 제가 이렇게 건의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상 말씀 올리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수고 하셨습니다. 질의 하시지요.

김영구의장

저기 위원장님 부탁 말씀 하나 드릴 것은 앞으로 별도의 발언권 없이 일문일답을 하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김영구의장

지금 김백선장군 얘기가 처형 얘기가 되면서 많은 어떤 사료적이나 이런 말씀들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문제는 임선생님께서 제기한 김백선, 오장문, 유난형이 처형이 이게 이렇게 같이 처리 돼야 되느냐? 또한 그것에 대한 제기를 하셨거든요. 그런데 당시로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김백선장군의 처형사실과 오장문, 유난형의 처형사실은 사실이 틀리다.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고인

참고인

방홍규 아까 말씀을 드렸는데 내가 조금 흥분 했는지 모르겠어요. 역사적 사실을 갖다가 자꾸 말씀을 드리는 것을 이해를 난 돕기 위해서 장승엽을 얘기를 한겁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떠한 죽음을 당하더라도 그 죽음 앞에는 경건한 것이 인간의 상식입니다. 하물며 국가를 위해서, 의병의 정의를 김유식선생은 또 이렇게도 했어요. 국세주의자고 이랬습니다. 당시의 우리의 어려운 처지에는 국세주의라는게 가장 적합한 말일런지는 모르겠어요. 거기에 몸을 바쳐서 싸우시던 분을 처결이라고 한다면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 장삼현교수님한테 제가 그랬어요. “내가 이런 애기를 하면은 당신네들은 역사적 사실을 갖다 기록 한거라고 말씀 하실거 아닙니까?” “역사적 사실이라면 사실과 사실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수님이기 때문에 초보적 지식이라고는 난 말씀은 안 드렸습니다. “구분을 해야만 역사를 올바르게 기록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심사위원 훈장을 받지 않았습니까? 심사위원들이란건 학계에 대단한 분들의 사안을, 역사를 볼 줄 아는 사안을 거친 훈장이 아닙니까? 하면은 이 양반은 애국지사입니다. 애국지사기 때문에 이 을미의병이라면은 애국지사에 대한 예우로써도 지워야 할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린거고 또 그 취지가 오늘 내가 여기와서 말씀 드리고 싶은게 그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승엽이라고 하는 그러한 친일파도 친일파라고 했는데 역사편찬위원장이라는 분이 옷을 벗을 수 있게끔 돼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그린겁니다. 그래서 장승엽이가 나온 것이지 내가 뭐 어떤 것을 갖다가 자랑하기 위해서 말씀 드린 것은 아닙니다.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지금 방선생님 말씀은 역사의 사실은 잊더라도 대단하고 훌륭하신 분에 대한 예우차원은 있어야 됐어야 되지 않았느냐 이런 견해를 그때 장교수님께 말씀 드렸다 이 말씀이시지요?
고인

참고인

방홍규 예, 말씀 드렸어요.

김영구의장

그다음에 또 임선생이 제기하신 것 중에 동참문제를 얘기 하셨는데 “김백선도 지평사람인데 의리와 기개가 있어 괴은을 따라 동참 하였다” 이것이 잘못 되지 않았느냐?“ 아까는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이게 잘못 됐다는 얘기는...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아니, 잘못 됐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안승우씨나 이춘영씨는 그 몇대손까지 나열을 해서 이렇게 해 줬는데 김백선씨만은 단 이렇게 썼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거지요.

김영구의장

아, 그런 뜻이었습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그러면 하나 다른 뜻으로 물어 볼테니까 알고 계신대로 답변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 김백선장군은 아까 서두에서 말씀 하셨던 “괴은이 김백선을 설득하고 고을 사람을 의리로 깨쳐서” 이 글귀하고 “김백선도 지평사람인데 의리와 기개가 있어 괴은을 따라 동참하였다” 이것은 김백선 장군은 사실 이런 할 뜻이 없었는데 괴은이 김백선을 설득하고, 설득이란 말은 뜻이 없는 사람을 종용을 했다는 결국 그런 글귀이고, 또 “괴은을 따라 동참 하였다” 이 동참 따라 동참 하였다는 것은 사실 이것도 자의가 아닌 거의 이끌리지 않았느냐 이런 글귀로 그렇게 물어 보신걸로 전 잠깐 생각을 했었는데 만약에 지금 글귀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김백선장군이 사실 의병할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괴은이 설득하여 의병할 생각을 했고, 그리고 또 괴은을 따라서 동참했다.
고인

참고인

안금식 그것을 제가 좀 원문을 읽어 드리면 어떨까요? 이게 제가 생각할때요, 설득했다는건 잘못 된겁니다. 왜냐 하면은...

김영구의장

아니 그래서 아까 그런 말씀으로 하신걸로 알았는데 지금 그건 아니시라고 그러니까.
고인

참고인

안금식 아니 설득이라는 것은 잘못이예요. 왜냐 하면은 괴은이춘영이 김백선을 만나 보기 이전에 맹영재에게 의병을 하자고 얘기를 했는데 맹영재씨가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관아 뜨락에서 총대를 뿌러뜨리고 집에가서 분격하고 있던 차에 김백선을 괴은이 찾아가 만난거지, 설득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의기투합이 됐다는 얘기입니까?
고인

참고인

안금식 그렇지요, 그렇게 봐야 됩니다. 이미 역사 종의록에 나오는 기록 근거로 볼적에 괴은이춘영씨가 만나기 이전에 스스로 의병을 하고자 하는 행위가 있었던 겁니다, 김백선한테. 그걸 그러니까 제가 주장하는 건 뭐냐하면은 지평의병 창의는 제천쪽에서 주장하는 위정척사정신의 바탕을 둬서 출발된건 아니다 그겁니다.

김영구의장

아니 또하나 김백선장군에 관해서 하다 보니까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맹영재 당시 감역이면서 김백선장군하고는 전우사이입니다. 그렇지요?
고인

참고인

안금식 그렇지요, 예.

김영구의장

같이 동학란을 토벌한 전우사이인데 맹영재는 그후에 사실상 떠가지고 요새 말로 지평을 휘하에 둔 군수, 결국 군수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돼 있으면서 김백선장군이 포수대장으로 이렇게 돼 있었지요. 그러면서 “같이 의병을 하자” 그러니까 당시 맹영재군수는 난 이정도까지 됐으니 솔직히 꺼렸을 것이고 그러니까 분격해서 그런 일이 났고, 혹시 안선생님께서 을미의병 비문으로 해서 기초를 하신걸 본적이 있는데 거기에 제 기억으로 “맹영재의병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쓰셨는데 그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고인

참고인

안금식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말이지요, 중간에 맹영재가 협조는 안 했지만 끝에 가서는 기록이 두군데 나옵니다. 의병에 참여해서 죽은 것이 기록에 나옵니다.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처음에는 쉬운말로 몸을 사리다가 결국 나중에는...
고인

참고인

안금식 죽을 때 가서는 의병에 참여 했기 때문에 기억해야할 인물입니다.

김영구의장

의기를 일으켜서 의병으로써 전사했다?
고인

참고인

안금식 예, 그럼요.

김영구의장

그 사실은 지금까지 그렇게 큰 어떤 표출이 될만한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을미의병과는 관계가 좀 없지 않느냐?
고인

참고인

안금식 아니지마는 그 기록을 찾았습니다. 그 기록을 찾았기 때문에...

김영구의장

사실 을미의병의 진 기념비를 세우게 된 진 의의는 을미의병이 우리 지평, 곧 양평에서 처음 시작 된 것이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정신 아닙니까?
고인

참고인

안금식 아닙니다. 제가 말씀 올릴께요. 여기 저는 그런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제목 자체가 을미의병기념비 이렇게 돼 있는데 이 뒤에 하단 다섯째줄에 가면은 지평의병 이런 구절이 나오거든요. 그래 저는 이게 을미의병기념비하면 을미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총체적으로 다 다뤘어야 되는데 여기 담겨져 있는 내용은 지평의병 얘기를 다루고 있는거거든요. 그래서 전 제목자체가 “을미의병기념비” 이것 보다는 앞에 지평자가 붙어 갖고 “지평을미의병기념비” 이렇게 갔어야 옳았다 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김영구의장님이 말씀하신 김백선과 괴은의 만남의 장면, 역사의 기록이 그렇게 돼 있거든요. 설득이 아니고 괴은이 밤에 가서 만났더니 김이 크게 기뻐하며, 설득한 게 아닙니다. 만났더니 아까 말씀하신 대로 아주 정확하게 분석해 보신 겁니다, 의기투합해서 기뻐했다. 이렇게만 돼 있는 거기 때문에 이 비문에 “설득하고” 이것도 오류입니다. 엄청 잘못 된 겁니다.

김영구의장

또 하나 계속 다른 쪽으로도 자꾸, 김백선장군의 처형을 부정하는 그런 견해도 있으십니까?
고인

참고인

안금식 제가 이것은 사적인 견해를 전제해서 말씀을 올릴께요. 제가 의향지편찬위원회 일원으로써 집필을 해 가느냐고 열심히 자료를 쫒아 다니고 이렇게 찾다 보니까 그 내용속에 양반계층과 평민계층간의 갈등 관계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기록상에 나와요.

김영구의장

독립운동사료집에도 명시돼...
고인

참고인

안금식 예. 갈등관계가 나오기 때문에 저는 그러나 이게 우리 안승우씨도 양평분이고 김백선씨도 양평분이고 하는 관점에서 우리가 되도록이면은 그 갈등관계를 크게 표출할게 아니고 후세에 민족을 위해서 피흘려 목숨 바친 분들이니까 화합적인 측면으로 좋은 점만 바라보는 쪽으로 하는게 좋지 않겠느냐 하고 그 갈등관계를 너무 표출 안할려고 저는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있던 것만이 사실이라는 것만 그냥 이렇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김백선장군이 처형된 것은 사실이고요?
고인

참고인

안금식 예, 제가 잘 밝혀지지 않았던 양평에서도 잘 모르고 있던 사항입니다. 충주성을 점령했을 때 오장문씨가 처형을 당했는데 영솔장 오장문씨가 처형을 당했는데 그게 관부에 문서 좀 찢고 이렇게 민가를 뒤지고 왜군을 찾는다는 미명하에 그랬다 그래서 처형을 했는데 영솔장이만 처형을 해 갖고 시신을 목을 잘라 매달았습니다. 이건 아주 우리가 볼 때 잘못된거죠. 처형했다는 것도 제가 생각하는 시각은 그게 과연 처형감이 됐겠느냐 그래서 김백선장군이 그때 지평을 왔습니다. 지평을 와가지고 포군을 100명을 더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지평에서 의병에 처음에 참여할 때는 400명이었지마는 100명을 더 데리고 갔기 때문에 500명으로 우리가 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문맥을 보면 김백선을 따르던 김의식씨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도 죽일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장문씨 이런 분들이 처형이 됐지마는 그것이 몰지각하고 누구 민가에 들어가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이렇게 파렴치하게 행위를 했다면 몰라도 그런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의병으로 가담해서 평민이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했다는 쪽도 저는 그런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양평에서는 그런 분 명예를 회복을 해 줘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김영구의장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 지평을미의병기념비문이 되어야 된다는 그런 말씀도 하셨고요, 또 을미의병의 원초적인 모든 것이 우리 지평, 양평땅에서 되어야 된다는 정신이 우선이 아니냐니까 그게 아니시라고 하시면서 뭡니까? 끝부분 다섯째줄에 있는,
고인

참고인

안금식 지평의병.

김영구의장

지평의병은 화문에 위촉 인맥이 중추가 되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감정적인,
고인

참고인

안금식 아니 그게 감정적인게 아니고 역사의 시각은 현장하고 맞춰봐야 되기 때문에 접목이 어디서 되어 있는가 하면은 안승우씨가 올 때 1차 접목이 된 것이고요, 2차 접목은 영월에서 류인석씨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할 때 2차 접목이 되어진 것으로 이렇게 봐야 됩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지평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제천 장담에서 “너희 이래라 저래라”한 그 지시에 의해서 되어진 것은 아니다 이겁니다.

김영구의장

아니 그건 시간차, 거리차가 있었다는 말씀은 아까 하셨고요, 4일간의 시간차도 있었고 또 30리라는 거리차도 있었다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기억이 나고요, 사실상 화서선생 또 문인계열들의 위정척사정신이 전국의 의병정신이 된 것은 사실 아닙니까?
고인

참고인

안금식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까 우리 박위원님도 말씀하셨지만 그 시대에는 위정척사정신의 바탕이 우리 국가를 보호하는 민족적인 정신의 바탕이었습니다. 제가 그것 부인하는 것 아닙니다. 그것 우리가 인정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시대 정신적인 바탕이었었는데 제가 말씀올리는 것은 애초에 지평에서 의병이 발진할 때도 그랬느냐 그건 어느 때부터 접목이 됐느냐 이걸 제가 구분하자는 얘기거든요. 당초에 예를 들면은 동학난 쪽에서 움직이던 김백선이가 위정척사 정신 가지고 한 것은 아니거든요. 동학쪽에서 하다 보니까 나라의 명성황후도 시해를 당하고 군부도 머리를 깎고 이런 오욕적인 일이 중앙에서 일어나니까 “이래서는 안되겠다. 의병을 일으키자” 이렇게 일어선 분위기는 위정척사 바탕은 아니다 이거죠. 그때 시대적인 사주나 흐름이 분격하게 의병을 일으키게끔 촉매했다고 이렇게 보는거죠.

김영구의장

그러나 김백선장군은 어떤 화서 문인도 아니고 또한 양반계급도 아니고 당시에 상당히 쉬운말로 얘기하면 아주 영웅호걸 호걸중에 한사람으로서 그게 아니었을 뿐이었었고 그 김백선장군을 제외한 많은 의병장 또 의병에 뜻을 가진 분들은 위정척사정신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죠.
고인

참고인

안금식 그런데 그것은,

김영구의장

또한 김백선장군도 이건 제 개인의 추측입니다만 그런 위정척사의 정신으로 있지 않았느냐.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왜세에 항거하다 보니까 누구나 위정척사의 정신은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위정척사 정신이 의병을 일으킨 기본정신이 아니라는,
고인

참고인

안금식 그런데 그것은 말이죠 제가 말씀을 올릴께요. 여기서의 중요한 관점은 뭐냐 하면은 지평에서 의병이 발진할 적에 위정척사 정신이 전부는 아니라고 보고요, 저는요. 전부는 아닌데 여기서의 관점은 제천의 장담에 있는 류인석 휘하의 분들이 진두지휘를 해서 한 것 마냥 그쪽에서 주장하고 있으니깐요. 그것이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위정척사 정신을 배척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건 위정척사 정신에 바탕을 갖고 갔더라도 지평에서 자의적으로 간 것이지 제천에서 진두지휘하는 그쪽에 지휘를 받고 지평에서 의병이 일어난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명쾌하게 기록상에 나오니까 그렇게 보자는 시각입니다.

김영구의장

지금 말씀은 조금 정리를 하자면 양평에 의병이 일으키게 된 이유가 사실 당시 제천 장담 이런데 계셨던 화서학파 특히 류인석선생의 애초부터의 지시에 의해서 또 그 계획하에서 의병이 궐기됐던 것은 아니다?
고인

참고인

안금식 예.

김영구의장

그럼 또 하나 자꾸 말씀을 많이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상 김백선장군에 대한 양평의 의병정서는 대단합니다.
고인

참고인

안금식 대단한 거죠.

김영구의장

특히 김백선장군에 대해서는.
고인

참고인

안금식 예.

김영구의장

그런데 어느 향토사료든지 다 내용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고인

참고인

안금식 물론이죠.

김영구의장

그래서 또 한쪽의 김백선장군이 무슨 지금 독립운동가 사료집이나 이런데 보면 참 적이 앞에 있는데 한명의 정말 병사도 필요한데 더군다나 용감무쌍한 용장을 처형해서는 되겠느냐 하는 그건 후의 얘기고요, 그 당시에 어느 또 다른 사료에는 김백선장군이 상당히 성격이 거칠고 안하무인이고 또 쉬운말로 자기의 세력을 넓히는데 항상 힘썼고 또 그동안 양반에 대한 특히 감정이 너무 격해서 김백선장군에게 참 뺨이나 상투를 끄들린 양반출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런 것도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고인

참고인

안금식 예, 그것도 본적이 있고요, 제가 지금 집필을 해 가면서 안타까워하고 아쉬워 하는 것은 최후에 저희가 김백선장군이 처형당한 대장소 현장에도 가 보고 느낀 점이 뭐냐 하면은 혁대를 클르고 “나를 묶으시오”하고 무릅을 꿇고 부복해서 잘못을 자인하고 뉘우치면서 용서를 빌었거든요. 끝까지 버티고 그랬다면은 모르는데 잘못을 뉘우치고 “나를 묶으라”하고 무릅꿇고 혁대를 클르고 부복해서 빌었는데 왜 용서를 안해 줬느냐 그게 아쉬움으로 남는 겁니다.

김영구의장

글쎄, 그 말씀이시라면은 또 한 기록에는 당시 의암대장께서는 참 “읍참마속의 그런 심정으로 너를 처형한다. 참 너가 내 자식보다 더 낫다”하면서도 “군율을 위해서 참 대의를 위해서 처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그런 기록이 또 있단 말이예요.
고인

참고인

안금식 글쎄, 그 기록을 그 기록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분위기가 그 뒤에 그러면 이건 조금 얘기가 뒷얘기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갈등관계인데 그럼 그 뒤에 김백선의 아들들을 죽일려고 사람들을 보내지 말았어야 되거든요. 김백선 아들들하고 김의식씨를 죽일려고 하는 바람에 김의식씨하고 김백선 아들들이 어디로 갔는가 하면은 민호형 강릉 의병장한테로 가서 김백선 밑에 있던 김의식씨가 강릉 의병장한테로 피신을 가가지고 거기가서 중군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가 없다면은 그 말씀을 100%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는데 아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들을 죽이러 사람을 보냈거든요. 문제는 여기에 있는겁니다. 그래서 갈등관계로 볼 수 밖에 없는게 바로 그 점이거든요.

김영구의장

글쎄, 그 문헌도 그렇지만 사실상 당시의 실정은 옛날에는 지금이야 살인죄가 되지만 철천지 원수, 불구대천의 원수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입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는 것은 죄로다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우리 어떠한 그 당시 정서에는. 그렇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처낸 적군은 죽여라 그런 뜻에서 참 어떤 원수의 불씨를 없앤다는 생각에서 그 정도는 아들까지 죽이고 삼족 멸하는 것도 있는데 그 정도 갖고 지금 의암선생이 너무 잘못했다고 이렇게 하는건 어떤 편견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문헌에 있습니다만.
고인

참고인

안금식 편견이라고 보는 것 보다도 그렇게 되므로 인해서 제천쪽에서 활동하던 지평의병이 몰락하게 된 동기가 전술가며 기록을 제가 찾은 것이 양평 인근 홍천 이런 등지에서 동학을 토벌만 한 것이 아니고 저 목천까지 지평 포군들을 인솔해서 김백선이가 나가서 많은 전투경험을 했기 때문에 지평의병에서 전략이나 전투 경험있는 장군은 김백선이었는데 전략을 이끌어갈 수 있는 김백선씨가 처형당하고 없어지니까 예를 들면은 기록에서도 보셔서 알겠지마는 장기렴씨가 현대 무기를 갖고 쳐들어올 때 비바람이 몰아쳐서 갖고 있던 화약에 불을 당기는 이런 구식 총을 갖고 있어서 저는 개인적인 생각은 그래요. 김백선씨가 살았다면 맞서지 않고 일단 후퇴해서 물러났다가 좋은 일기였을 때 들어왔을게 아니냐. 거기에 맞서다 보니까 이게 몰락된건데 그러니까 전략가가 없으니까 후퇴를 안하고 맞선게 아니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한번 생각을 해 보는데 아무튼 아쉬움으로 남는 분위기입니다.

김영구의장

글쎄, 문헌이 서로 틀리고 적힌 증빙사료가 서로 틀리지만 어느쪽의 문헌에서는 참 지금 말씀하신대로 사기도 떨어지고 전쟁의 기술도 뒤떨어져서 패배가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원체에 역부족이라서 패배가 있었다 그런 정도니까 그것은 지금 우리 을미의병 비문하고는 좀 별관계인 얘기죠.
고인

참고인

안금식 별다른 얘기죠.
방홍규 거기에 대해서 조금 보충설명을 드리면 안될까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그렇게 하시죠.
고인

참고인

방홍규 지금 김백선 기록을 말씀하시는데요, 그 기록을 그 양반의 기록이라는게 하사, 안종응선생 사실 실기가 있지 않습니까?

김영구의장

예, 창의사실이요.
고인

참고인

방홍규 그게 바탕으로 해 가지고 이런 기록이 나온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기록을 가지고 아까 내가 말한것과 같이 우리가 좀 비판적으로 볼 것이 있고 또 그걸 수정할 수도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를 하나 말씀드리죠. 맹영재라는 분이 지평현감이었습니다. 지금 그 후손들이 여기 양평에서 살고 있습니다마는. 그 양반의 기록은 어떻게 됐느냐 하면 의병이 지평에 들어오니까는 현에 계시든 국민이라고 하나요? 국민이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나? 리민들이 분개해 가지고 그 양반을 때려죽인걸로 되어 있어요, 한 귀절에는.

김영구의장

아 어느 다른쪽 사료에는요?
고인

참고인

방홍규 이게 하사안공실기에 그게 나옵니다.

김영구의장

창의사실이요?
고인

참고인

방홍규 예, 그래 그 이유는 뭐냐하면 이송웅이가 춘천의 의병장 이송웅이가 거기서 패해가지고 지평에다 원병을 왔는데 그 사람을 가뒀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똑같은 책입니다. 거기에는 이 양반이 의병을 이끌고, 나 이름을 잠깐 잊어버렸네. 여기 어딥니까? 거기 어디라고 그랬죠? 아니 여기 가평 있는데 거기.

김영구의장

미원이요. 당시 미원이요.
고인

참고인

방홍규 거기를 가시다가 일본얘들의 기습에 의해 가지고 돌아가신걸로 또 기록이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이중적으로다가 됐습니다. 하면은 내가 맹영재 그분에 대해서 좀 연구를 해 봤어요. 왜 연구를 하게 됐느냐 하면은 연구라고 하면 좀 어패가 있습니다마는 맹형규가 우리 친목회원입니다. 지금 세월리 사는 분이. 나이는 적지마는 양평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분 몇분들이 우리가 친목회를 구성해 가지고 모여요. 그래서 그 양반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는 이게 나와가지고서... 여기에 맹영재가, 이게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갑호 을미 의병사에 대해서 쓴 박사학위를 받은거예요. 그 논문에 보면은 맹영재가 단발령 공포후 지평·가평에서 동지들과 같이 의병활동을 했다고 이렇게 기록이 됐어요. 이것 박사학위 논문 받은겁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게 우리가 올바르게 정립을 할려면은 그 자꾸 말씀을 드리는데 사실(사실)과 사실(사실)을 구분할만한 안목이 우리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에 아까 말씀을 드린것이지 내가 자랑삼아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김영구의장

예, 방선생님! 만약에 그렇다면요, 지금 방선생님 참 우리 양평의 특히 역사에 대해서는 아주 해박하시다고 누구든지 말씀하시는데 지금 생각으로 이 을미의병비문이 그대로 존치되는 것이 합당하다, 아니면은 고칠 것은 고쳐야 되지 않겠느냐 사실(사실)과 정말 사실(사실)을 제대로 파악해서. 그렇다면 어떤 쪽의 생각이십니까, 지금?
고인

참고인

방홍규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김백선만큼은 난 지워야 할 것 아니냐.

김영구의장

예.
고인

참고인

방홍규 또 이걸 없앤다는 것도 힘이 듭니다. 왜? 아까 박위원님한테 말씀을 드렸어요. 원호처에서 나왔어요. 여기 아마 체육대회 하는 날이었을겁니다. “당신 나를 어떻게 알고서 나왔소?”하니까는 원호처에서요. 지제면사무소에 들어가니까 아무도 없더라. 거기 여자직원한테 물어보니까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역사에 대해서는 나한테 찾아가라고 그래서 왔다. 그런데 그분이 뭐를 취재하러 왔느냐 하면은 의병사와 전투전적지 이것을 책에다 수록할려고 자료를 받으러 왔다고 해요. 그런데 해 놓은게 있어요. 책을 배껴쓰더군요. 그런데 이 책을 외국으로도 보낸답니다. 특히 중국으로도 보낸답니다. 중국은 왜 보내냐 하면은 지평에 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를 해 가면서 그것 다 수록하고 사진도 찍어갔어요. 그러면 이러한 책자까지 지금 나오는데 그걸 없앤다는 것도 좀 뭐하고 특히 여기 문화원장님이 나와 계시지마는 문화원 이사회에서 이게 통과된게 아닙니까. 자구는 수정할는지 모르지마는, 일부는. 그걸 없앤다는건 조금 제 의견으로서는...

김영구의장

아니 그러니까 없애는게 아니라 그러니까 지금 그대로 존치하느냐 아니면 자구수정 말씀하셨는데 자구를 수정하면 되겠느냐 이런,
고인

참고인

방홍규 그것만큼은, 제 의견입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저는 굽힘이 없으니까. 김백선만큼은 지우는 것이 낫지요.

김영구의장

적어도 김백선만큼은 예우차원에서도 우리,
고인

참고인

방홍규 예우가 아니죠. 당연합니다.

김영구의장

당연히 지워야 된다?
고인

참고인

방홍규 예.

김영구의장

그 처형당한 사실에 관해서는?
고인

참고인

방홍규 제가 한가지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릴까요?

김영구의장

예.
고인

참고인

방홍규 좀 죄송스럽습니다. 제가 이걸 하느라고 대학교를 많이 쫓아다녔어요. 서울대학교 신용학교수님을 한번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그래요? “저 양평서 왔습니다” 그래서 “뭐를 물으러 왔느냐?” “의병관계에 대해서 좀 여쭤보러 왔습니다”“양평이 아닐텐데?”이러시데요. 그래서 “지평입니다” 아 벌떡 일어났어요. 일어나시며 “의향에서 오셨군요!” 그런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만큼 지평의병에 대해서는 우리가 김백선이가 처형됐다는 것 이것보다도 그러한 분이 있기 때문에 지평이라는 의병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윤덕수교수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정신문화원 대학 교수로 계신데. 이분도 찾아가니까 의향이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이 의병비만큼은 더욱 애착을 가지고 수호하는 것이 수호한다면 좀 뭐합니다마는...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결국 말씀은 문구수정이 가능하다면 자구수정은 해야 되지 않느냐?
고인

참고인

방홍규 예, 저는 그렇습니다.

김영구의장

위원장님! 사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분 말씀하신 것 저희 녹음이 다 되어 있고 어차피 또 계속해서 내일도 또 다른 쪽의 참고인들을 모실 것 아니겠습니까?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예.

김영구의장

그래서 세분이 가지고 오셔서 아까 말씀도 하셨지만 혹시라도 빠진게 있다면 그 자료를 저희한테 제출해 주셨으면 하고 요청해 주셨으면 합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그렇게 해 주시지요. 자료 가지고 오신게 저희한테 주신 것에 누락 된 것이 있다면 저희한테 첨부를 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고인

참고인

방홍규 여기 첨부가 다 돼 있을 겁니다.

김영구의장

아니 그 외에도 또 혹시 못 하신게 있으면 주고 가시면...
고인

참고인

방홍규 한가지 더 말씀을 드린다면요, 우리가 위정척사를 아까도 말씀을 하셨는데 이게 양평으로써는, 양평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이런 얘기를 해요. 일본에는 야마토다마시라는 하나의 정신을 밀집력으로다 삼아 가지고 국민 생활속에 까지 파고 들은거 아닙니까? 독일이라는 나라는 오조라는걸 가지고서 국민속에 파고드는거 아니냐. 하면 한국이라고 한다면은 뭐를 내놓을게 있느냐? 거기에는 위정척사사상이란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이것은 정신적 철학이 있는거니까. 그런 말씀을 학자들이 하는 것을 제가 그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때에 위정척사 발단지가 옛날서부터 있었지마는 특히 행동으로 옮길 수 있고 실행한 것이 양평이라는 겁니다. 아까 안위원님께서도 말씀을 하셨지마는 지평의병이 왜 유명하냐? 정부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봉위입니다. 괴산 봉위. 문석봉이가 제일 먼저 일으켰어요. 그런데 요즘 새로 나온 것은 2년전에 벌써 이미 이북에서 했다는게 학자들이 이 뒤에 나와요. 그러면 지평의병이 왜 제일먼저라고 주장하고 학계에 까지 학계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다루느냐 하면은 군사를 편성해 가지고 향립군이 아니라 원주 점령해, 제천 점령해, 단양 점령해, 충주도 점령했습니다. 여기에 전국에 있는 선비들이 거기에 동화해 가지고 일제히 일어난게 지평이라고 학계에서는 그렇게들 얘기하고 있어요. 지평의병 하나 가지고 박사학위가 나왔다면은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한가지 더 말씀을 드린다면 화서학파에 지평의 금계선생님이 계십니다. 이근원이예요, 전주이씨입니다. 이 분이 10월 28일날 성균관대학에서 학술대회가 있었어요, 하기로 했었어요. 그래 문화원장님한테도 다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마는 우리 고장에 있는 분을 학술대회에 까지 그것도 학술회에 까지 나갔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깊이 후원을 할 그러한 처지입디다. 그런데 그것이 연기가 돼 가지고 11월 말로 됐어요. 그 주제발표하는 분은 박인용박사가 문학박사가 그것을 하기로 돼 있는데, 우리 고향에 계시는 분이고 우리 고향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러한 훌륭한 분을 우리가 좀 부상시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김영구의장

고맙습니다.

고기섭위원

제가 한가지 물어 볼까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말씀 하시지요.

고기섭위원

의장님이 하나하나 다 집어 주셨기 때문에 별로 물어볼건 없습니다만 아까 안금식참고인께서 아까 답변하신 중에요 잘못 비문이 슴으로 해서 이게 잘못 하면은 딴데서 의병이 일어난 것 처럼 될 수 있다. 사실 그것에 조금 관심이 갑니다. 그 내용만큼은 정확하게 장교수가 오셨을 때 우리가 그 보완사항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꼭 내용을 참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인

참고인

안금식 예, 제가 우려하는 부분은 위정척사정신에 바탕을 둬서 했다 하더라도 그 핵심적인 멤버들이 제천에 앉아 있어 갖고 제천에서 한 듯이 끌고 나가는게 바로 이책이거든요. 그리고 정신문화원에 가서 김상기씨가, 여기 보면은 지평의병에서 제천의병으로 이런 제목을 달고 김상기씨가 박사논문 쓴걸 인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정신문화원에 가서 박사논문쓴 논문을 추적해 갖고 자료를 저희가 복사 해 오고 그랬는데 거기 보면은 이번에 저희가 이런걸 쓰면서 저희도 많은 사실을 깨닫고 배웠는데요 저도 양평이 충청도에 예속했던 사실을 몰랐어요. 그런데 충청도에 예속이 돼 있는데 유인석씨가 지평의병의 개념을 총체적을 나중에 개칭한 것이 호자의진입니다. 그런데 호자의진이라는 개념은 단양이라든지, 영월이라든지, 또 제천, 원주, 충주, 또 넓은 의미에서는 옛날에 양평도 그 충청도에 예속 됐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호자지역으로 이렇게 표현 한 것을 이번에 기록정리를 했는데, 자료를 찾아 갖고요. 그런데 이 구완회교수가 이 속에 못 박아놨습니다. “호자는 의림지고, 의림지 옆에 있는 제천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 호자의진은 제천의병이다.” 이렇게 끌고 나가고 있거든요.

김영구의장

그 구교수는 제천 분 이십니까?
고인

참고인

안금식 제천 분이 아니예요.
방홍규 충북 보은이예요.

김영구의장

보은이요?
고인

참고인

방홍규 보은사람이고, 학계에서는 그래도 많이 알려졌고요.
안금식 그래서 김상기씨 논문을 인용을 했기 때문에 정신문화원에 저희가 가 갔고 박사논문을 전부 복사하고 그 부분을 발췌했는데 김상기씨가 제천의병이라고 규정을 해 놓으면서도 제천에 이렇게 규정을 했습니다. 춘천부, 충주부 이렇게 포괄적으로 넓은 의미로 하면서 여기가 제천의병이다. 이게 이론상으로 안 맞는 이론을 전개 한겁니다. 그건 호자의진으로 가야 되거든요. 그리고 제가 사적을 쭉 추적해 보면은 지평의병에서 영월에서 부터의 관점입니다. 지평의병에서 제천의병이다 이렇게 이론을 끌고 가는 분이 있는데 제천의병이라고된게 아니고 충청도 제천의병 이렇게 이끌고 갔습니다. 충청도 제천의병이라면 충청도가 왜 들어 가냐 하면은 그게 호자의 개념이 있는 겁니다. 그래 제가 총체적으로 볼적에는 어느 기록에도 지평의병에서 제천의병으로 바꾼다는 내용상의 어떤 기록이 안 나옵니다, 내용상의. 그러니까 저는 충주성을 점령하기 까지는 지평의병이 점령했다는 이론을 우리는 밀고 나가야 됩니다. 그래 저희가 회의를 할 때도 편찬위원회 할 때도 제천쪽에서는 향토애적인 측면에서 그쪽 사람들은 제천의병으로 하더라도 우리 양평쪽에서는 충주성을 점령할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우리는 “지평의병” 이런 개념을 갖고 우리가 임해야 된다. 이것이 향토애고 우리의 양평의 주체를 찾는건데 이게 우리가 퇴색되지 않고 우리가 쉽게 그냥 양평쪽에 있는 사람들이 제천의병, 제천의병한다면 저쪽에서 주장하는 학설을 이쪽은 없는 것도 이것, 저것 끌어다가 어거지로 자기네 것 처럼 만들려고 그러는데 아차 잘못 하면은 우리가 동조해 주는 꼴이 되기 쉽다. 그래서 바로 제가 우려하는 것이 저는 장삼현교수님이 잘 썼다, 못 썼다 하는게 아니라 장삼현교수님 수고 많이 하신 분입니다. 책도 그렇고,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비문도 그렇고 수고 많이 하고 애쓰셨다는 공적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 가야 됩니다. 또 우리가 솔직한 얘기로 양평으로 볼적에 그만한 이쪽 분야에 관심갖는 교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그런데 그 분도 사람이고 기간이 짧다 보니까 장삼현교수님도 실수 하실 수 있는 것을 그런 관점에서 봐야지 그냥 이건 장삼현교수님이 무조건 잘못 했다 전 그렇게 보는 시각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 올린 그 부분이 처음에 안하사는 제천에 계셨지마는 이춘영씨는 거기 있지도 않았거든요. 않았는데 있는걸로 되서 우리가 양평에다 이런 기록을 남긴다면 제천쪽에서 사학을 연구하는 분들이 “아, 이 양평의 학자가 이춘영씨도 거기 동참해서 거의소청에 참여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장담해서 진두지휘한게 맞지 뭐 틀리느냐?” 할 때 그때 가서 우리 후대 사학자들이 어떻게 반론을 제기하겠느냐? 걱정하는건 제가 이 부분입니다.

김영구의장

예, 알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참고인 세분 선생님 우리 위원님들 질문에 성심 성의껏 답변해 주신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중식을 위해서 1시 30분까지 정회를 하겠습니다. 정회를 선포합니다.

12시11분 회의중지

13시34분 계속개의

성원이 되었음으로 회의를 속개 하겠습니다. 용문종고 이동훈교사님께서 이 자리에 참석 하셨는데 을미의병에 대한 견해를 위원님들께 좋은 말씀을 한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김영구의장

사전에 좀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위원장님?
영호

이영호위원장

먼저 질의를 하시게요?

김영구의장

저간 얘기를 조금 묻고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의장님 먼저 말씀 하시지요.

김영구의장

위원장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위원여러분 아까 아침 일찍이 여종고에 국사교사께서도 하셨고 또 지금 용문종고 국사교사 이시고 사실 세분을 참고인으로 출석요구를 했는데 한분은 양평종고에, 그런데 아마 세분이 시간이 엇갈려 가지고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위원장님이 왜 저희 의회에서 세분을 참고인으로 출석요구 한 것은 아까도 들으셨지만 앞에 내용중 개화당, 개화파 이분들에 대한 주적인거래서 그쪽에 대한 것을 우선 하시고 나중에 또 더 물을게 있으면 하시는 쪽으로 위원장님께서 진행을 해 주시지요. 저간 사정을 왜 이렇게 오셨는지, 참고인 요구를 했는지 이렇게 해서 말씀을 드린겁니다. 지금 이선생님께서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특히 역사, 국사에 대해서 가르키고 계시는 분이 맞으시지요?
고인

참고인

이동훈 예, 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김영구의장

을미의병 비문을 보셨겠지만 저희 당시 우리 지평의 의병동기와 더불어서 비문이 전개 되면서 앞쪽에 “왜적은 시랑과 같은 야만성을 드러내어 고의로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병탄을 목적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김홍집, 정병하등 간적을 사주하며”하면서 당시의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세력, 개화파, 개화당 여러분들을 간적으로 기술이 됐습니다. 그점에 대해서 어떻게 지금은 학생들에게 이분들을 조명해서 가르치시는지, 그리고 이 을미의병기념비는 사실상 우리 향토사적도 되지만 국가적 사적도 되기 때문에 오늘, 내일 세워지고 없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영구히 서 있을 것으로 추후에 우리 후세들 또한 그외에 여러분들이 이것을 기념비를 보았을 때 과연 이 내용이 지금에 조명되는 근간에 세웠습니다, 지금에 있어서 이렇게 돼야 되는지 그런 점에 대해서 견해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고인

참고인

이동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용문종합고등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있는 이동훈이라고 합니다. 어저께 이 내용을 받아봐 가지고 한 번 읽어 봤거든요. 제가 정확히 알 수 있는 부분은 전문가는 아니니까 여기에 대한 전체적인 것은 제가 말씀 드릴게 없는 것 같고요, 여기에 나와 있는 방금 말씀하신 김옥균이라든가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김홍집, 정병하 이분들을 간적으로 사주하고 이분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가지고 그때 활동을 하신 분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국사교과서에는 그렇게 표현이 되어 있거든요. 여기에서 간적이다, 아니면 충신이다 이러한 표현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 대한 그대로의 행적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대한 잘 했다, 잘못 했다는 그런 평가는 지금도 서로 분열이 되어 있는거거든요. 그러니까 역사라는 것이 지금 하나로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평가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가지고, 예를들어 가지고 김옥균 같은 사람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다음에 암살을 당 했고요, 그다음에 박영효 같은 사람은 일제시대까지 있으면서 작위를 받고 활약을 했었구요. 그다음에 유길준 같은 사람은 한일합방 되고나서 작위를 일본이 준다고 했을 때 그 작위를 거부하고 살았던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제가 알고 있고 평가하는 것은 이분들은 하나의 선각자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라는 평가정도 제가 알고 있고요. 거기에 대해서 이사람들이 간적이다 아니다 이렇게 평가하기는 좀 무리가 있다라고 전 생각을 합니다.

김영구의장

내용은 이 분들중에 사실상 친일 행각을 한 분도 있고, 또 친일을 거부한 분도 계시는데 이렇게 간적으로 평가하기는 참 무리가 뒤따른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고인

참고인

이동훈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영구의장

예, 전 끝났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더 질의하실 위원님 계십니까?

박선배위원

제가 한가지만 여쭤볼께요. 지금 아까도 말씀 하셨다싶이 지금 우리가 역사를 보면 김옥균이 같은 사람, 다는 아닙니다마는 김옥균같은 사람은 그때 정치사로 보면은 상당히 우리나라의 뜻과는 이적행위를 했다고도 볼 수 있잖아요, 생각하면?
고인

참고인

이동훈 그런데 이적이란 것이 그 당시에 무엇을 추구했느냐가 지금 평가는 해야 된다고 보거든요. 만약에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사람하고 개화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누가 더 그당시에 애국이냐라는 것은 만약 지금 판단하고 또 그당시 판단을 틀릴거라고 보는데요, 사견임을 전제하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 당시에 위정척사를 가진 사람들도 비판받는 점은 하나의 지배층하고 피지배층을 그대로 유지한채 그대로 그것을 유지할려고 했다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거든요. 반외세적인 면에서는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지마는 봉건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라는 점, 그러니까 양반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어 가지고 전문적인 역사학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리냐 하면은 “위정척사사상은 민족주의가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그러한 몇분들도 계시고 그러니까 그것은 거기에 따라 가지고 여러 가지 판단이 있거든요. 그다음에 개화사상에 대한 것도 개화라는 것이 그당시의 상황에서는 친일적인 면이 굉장히 많습니다. 왜냐 하면은 개화라는 것은 선진 외국을 배우자라는 것이고, 그당시 우리한테 선진은 청이나 일본인데 그당시에 청보다는 일본쪽에 좀더 발단 했다고 생각하면서 그 나라를 배우자는 것이기 때문에 친일적인 성격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박선배위원

그러니까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개화쪽으로 그사람들을 했지 어떤 우리나라의 이적이나 어떤 이런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이시지요.
고인

참고인

이동훈 지금 갑신정변 평가도 일본에 이렇게 하기 위해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라기 보다는 우리 개화하기 위해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 결과적으로 일본을 이롭게 하는 사상들이 들어가 있었다라는 정도로 평가가 되고 있습니다.

박선배위원

결론적으로 선생님 말씀은 다 그런뜻이니까 이 간적이란건 여기에 해당하지 않다 이런 말씀이시지요? 아주 짤라서 말씀 드리면.
고인

참고인

이동훈 예, 간적까지는...

박선배위원

너무하다.
고인

참고인

이동훈 예, 평가를 한다기 보다는 잘 했다, 잘못 했다 평가 보다는 그냥 그사람 행적 그대로를 기술하는 그런 정도가 나을 것 같습니다.

박선배위원

간적이란건 너무 하다?
고인

참고인

이동훈 예.
영호

이영호위원장

더 질의하실 위원님 안 계십니까? 그럼...

박선배위원

그럼 가만히 있어, 그러면 한가지만 더 여쭈어 볼께요. 그러면 지금 선생님께서는 이 을미의병비문에 대해서 쭉 끝까지 읽어 보셨지요?
고인

참고인

이동훈 예, 읽어 봤습니다.

박선배위원

여기서 선생님 사견도 좋습니다만 의견이 여기서 어떤 부분이 꼬집어서 지적을 한다면 어떤 부분이 잘못 됐다고 지적하실 수 있습니까? 그건 어떤 저거니까.
고인

참고인

이동훈 뒤에 부분에 저희가 들어 가면은요 좀 구체적인 얘기가 나오거든요. 화서 안승우선생하고, 괴은 이춘영선생이 지평에서 을미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에 들어 가서는 저도 어저께 한번 보고서는 제가 모르는 부분은 참고자료를 찾아 볼려고 했는데요 이것보다 자세하게 나오는 참고자료를 못 찾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알고 있는 지식수준에서는 이 뒤에 부분에 대한 평가는 못 내리겠습니다.

박선배위원

그리고 그 밑에 “김백선 장군이 처형을 했다” 이 부분까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이동훈 거기도 제가 모르는 부분입니다.

박선배위원

알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더 질의하실 위원님 안 계시지요? 예, 고기섭위원님 질의하십시오.

고기섭위원

문구내용을 다 읽어 보셨다고 그랬는데요 “괴은, 김사정, 김용준의사가 모의하여” 그랬는데 그런데 제가 봤을 때 이 모의라는 단어는 말이예요 야합을 하거나 남한테 꼭 필요치 않은 일을 갖다가 담합할 때 필요한 말이 모의라고 생각하는데 일제시대때 썼던 말이었기 때문에 모의라고 쓸수가 있었는지 아니면 모의라는 단어가 꼭 여기서 거북하게 들리거든요, 제가 봤을 때는요. 그걸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고인

참고인

이동훈 그런데 그 단어에 대한 여기서 나오는 모의라는 단어가 여기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는 제 의견은 별로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제가 읽어보면 “괴은, 김사정과, 김용준의사가 모의하여” 그러니까 모의라는 뜻이 긍정적인 표현이냐 부정적인 표현이냐 이걸 묻고 계신 것 같은데...

고기섭위원

제가 봤을 때는 부정적인 일에서 단어가 쓰여지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가 한번 물어 보는겁니다.
고인

참고인

이동훈 저는 그렇게 부정적인 면으로는 느낌은 안 듭니다.

고기섭위원

그렇게 이해가 안 된다고?
고인

참고인

이동훈 예.
영호

이영호위원장

더 질의하실 위원님 계십니까? 바쁘신 시간 내주셔서 위원님들을 대표해서 제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없습니다」 하는 위원 있음

고인

참고인

이동훈 고맙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다음은 김찬제유허비 존치 반대주장에 대한 참고인을 모시고 진술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에 앞서 항상 저희 양평군의회 발전을 위해서 오전에도 수고를 하셨고 오후에도 수고를 많이 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오늘 참고인께서 이 자리에 오신 사유는 김찬제유허비 폐지에 대한 여부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참고인 의견진술이 끝난 후에 본 특별위원회 위원님들이 질의하시는 동안에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여기 독립운동가 김찬제 유허비 사건보다 여기서 을미의병 빠트린게 있데요. 그래서 그것을 잠깐...
영호

이영호위원장

먼저 설명을 해 주시고요?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그렇게 하시죠.

김영구의장

아니 잠깐만요 위원장님! 을미의병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요, 있다가 또 한분의 참고인이 학교선생님이 오시는데 그건 그때 해 주시고 지금은 유허비 관계로 하시죠.
영호

이영호위원장

질의하실 위원님 질의하십시오. 의장님 말씀하십시오.

김영구의장

고맙습니다. 그 동안 연암 감찬체선생 유허비 문제로 찬반론이 상당히 저희 관내에는 대두가 많이 됐었습니다. 그 중에 두분께서 그동안 신문이나 여러 관계여로로 보낸 기술을 제일 많이 해 주셨던 분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찬제 유허비가 왜 철거되어야 하느냐 우선 거기에 대한 정당성 있는 말씀을 먼저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설명을 올리겠습니다. 이게 사실은 김찬제씨가 피살된지 오래인데 김잔체씨를 들먹이게 되어서 유족되시는 분한테는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되기 때문에 거론을 하게 됐고 이 자리에 나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김찬제씨는 1918년에서부터 1925년 7년동안 갈산면장님을 일제치하에서 지내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개정 14년 그러니까 1925년 을축년 4월 30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도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피살된 것은 1925년 4월 20일경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 말씀을 참고하시라고 말씀을 드린겁니다. 이 분은 독립애국지사나 그렇지 않으면은 향토애국지사가 될 수 없다는 근거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기위 배부해 드린 독립운동사 사료집 제5집 삼일운동 재판기록에 명시가 되어 있듯이 이걸 저희가 한국사람이 재판하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재판을 한 기록입니다. 그 내용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497페이지를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재판기록. 이렇게 판결문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공흥리 출생 동서거주 농업 이용준 당시 37세입니다. 이 분이 이유가 뭐냐면은 독립운동 만세 그러니까는 개정 8년인가 그렇게 될겁니다. 1919년도에 3월 24일 오후 2시경에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갈산면 양근리에서 만세를 외치도록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면장님을 김찬제면장을 만세를 부르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만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끌고나와 구타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은 김찬제씨가 왜경 사법경찰관에게 공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을 드리게 되면은 이분이 만세를 부르라고 강박을 했으나 만세를 부르지 않으니까 끌고나가서 두들겨 팼다 이렇게 얘기를 왜경에게 고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용준씨가 징역 3년을 받은 그러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분이 독립애국지사다 또는 향토애국지사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아까도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1919년서부터 1925년 7년동안 면장을 하시는데 그 안에 14년의 1925년 4월 26일경에 피살됐습니다. 그렇다면은 적어도 만세사건이 1919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후에도 5년동안이나 면장을 더 하셨습니다. 왜정시대가 어떤 때입니까? 과연 이분이 독립애국지사다, 또는 향토애국지사다 할 수 있는 이 양반의 공적사항이 있다 하면은 벌써 이미 경찰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고 재판을 받았을 겁니다. 그와 반대로 지금 되었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 그 다음에 국가보훈처에서 한번 공문이 여기 있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나온 공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받아낸 자료가 아니라 양평군수님께서 국가보훈처에 질의를 해 가지고 받아낸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4번입니다. 4번에 「타율적인 일제의 압제하에서 개인적인 여러 처신방법과 사람별로 독특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일제 치하에서 수년간 면장에 재직한 경력 등을 독립유공자 포상대상으로는 적합치 않다는 것이 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원칙이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자꾸 거론을 하느냐 이것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999년 3월 10일 제16차 양평문화원의 정기총회를 개최할 당시에 전 양혜석 문화원장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느냐 할 것 같으면 “이분은 향토애국지사다. 친일이라는 것은 말도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지를 사서라도 이분을 유허비를 다시 세워야 된다”고 말씀을 하신지가 엊그저께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저희가 다시 반박을 한 사항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게 되면은 여기 문화원에서 양평군수님한테 보낸 회의록이 있습니다. 회의록을 보시면은 6번에 김찬체선생유허비건립의건을 상정한 사실이 있고, 그 다음에 양평문화원에서 양평군수님한테 또 보낸 공문이 있습니다. 연암 김찬제 유허비 건립에 대한 회신이라고 해서 보낸게 있습니다. 여기에 제3항을 보게 되면은 「위 사항에 대하여 민원인 임종선이의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입증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없으며, 일제치하에서 면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김찬제선생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이렇게 기록이 되어서 군수님한테 보내졌습니다. 그렇다면은 기록이 나왔습니다. 두말할 논할 여지도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입니다.

김영구의장

위원장님!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말씀하시죠.

김영구의장

임선생님! 유허비는 어떨 때 세우는 비라고 생각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공적이 있을 때 이렇게 세운다고 이렇게 봐야 되는지 저도...

김영구의장

그래서 만약에 독립운동가를 추모해서 비를 세운다면 아무개 독립운동가 추모비 이렇게 되겠죠?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또 무슨 하여튼 그런 비슷한 얘기가 되는데 유허비 과연 이 유허비는 왜 세우는가, 유허비는 뭔가 그것은 확실히, 지금 임선생님 말씀은 독립운동가 갈산면장 연암 김찬제 추모비 이렇게 세웠다면 당연히 독립운동가가 아니니까 이건 철거를 해야 되는데 향토애국지사 해서 김찬제 유허비 이렇게 됐습니다. 그럼 유허비가 과연 무엇이냐 이거죠. 그래서 이 유허비는 왜 세웠으며 유허비는 왜 철거되어야 되는지 이게 우선 이해가 저희로서는 덜 가는 부분이 있거든요. 유허비는 어떨 때 세우는겁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글쎄, 그것은 제가 확실하게 답변을 드리기가...

김영구의장

좋습니다. 하여튼 유허비는 상당히 참 존경할만한 어떤 또 칭송을 많이 받았던 이러한 분이라서 그 분을 추앙하는 뜻에서 세우는 것으로 일단락 지으시고요. 아까도 을미의병 얘기중에 잠깐 나왔습니다만 참 우리 양평군의 어느 역사든 참 아주 박학하게 아시는 방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마는 당시 감역이었다가 지평현감이 된 맹영재에 대한 사료도 이런 것이 있고 저런 것이 있었다. 그러면 김찬제 당시 면장도 물론 일제치하에서 면장을 지냈다면은 누구든 간단히 생각하면은 친일을 한다고도 볼 수도 있고 그러나 누구나 그분의 속 마음을 읽어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참 면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요새 흔히 쓰는 야당속에 여당, 여당속에 야당 이렇게도 합니다마는 그분 나름대로 또 우리 향토애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럴 수 있는 여지는 있습니다. 또 구전에 의하거나 이렇게 되어서 보면은 이분이 상당히 면장을 하시면서도 참 이웃에 대한 어려운 사람 특히 계몽적으로 좋은 일 봉사적인 일을 많이 하셨다는 구전이 있는데 그런걸로 인해서 유허비는 세울 수가 없다고 보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런데 유허비를 세우더라도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김영구의장

아니 그러니까 이분이 물론 일인 치하에서 면장은 했을 지언정 참 남보다, 누가 해도 면장은 할 것이고 그 가슴아픔을 딛고서 여러 고을사람들한테 좋은 일 많이 하고 했다면은 그것이 사실이라면은 유허비 세울 정도는 되지 않겠느냐 이거죠.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러나 애국지사, 향토애국지사다 이렇게 얘기는 할 수가 없죠.

김영구의장

그러나 말씀은 애국지사다 이렇게 되어 놨으니 사실 그걸 뭘로 뒷받침하겠느냐 이런 말씀이시죠? 이런 형사기록까지도 지금 나와있고 이분의 진술에 의해서 참 독립운동을 한, 만세운동을 한 우리 조선민이 이렇게 옥고를 치르고 했으니 그렇게 진술한 것만 봐도 이건 애국이라는 말은 여기 띄울 수가 없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렇지요.

김영구의장

글쎄, 그렇지만 이분이 그거와 별도로 그것은 면장으로서 또 어쩔 수 없이 행했던 일일 수도 있고 그 외에 다른 좋은 일을 해서 참 그것이 거의 정확한 사실이다 했을 적에는 그렇게 어려움속에서도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 하면은 그런 것이 또 밝혀진다면은 유허비 정도 건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러니까 그 내용에 따라서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김영구의장

그건 또 별도의 내용이고 지금,
고인

참고인

임종선 이분을 향토애국지사다 이것은,

김영구의장

지금 보시는 관점에서 향토애국지사 연암 김찬제 유허비는 마땅치 않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렇지요.

김영구의장

이렇게 당시에 이것도 한국사람이 쓴 것도 아니고 조선재판관이 주문한 내용 이유 이런걸 다 보면은 분명히 도저히 애국이라는 말은 여기 당치 않는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렇지요. 여기 공술을 했지 않습니까, 사법경찰한테. 해 가지고 징역 3년을 받게 했습니다.

김영구의장

저희도 언젠가 이 내용을 보시고 나서 이것 진의를 가려서 사실인 것을 저희도 증명을 했습니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공술을 이렇게 해 가지고 어떤 사람은 매를 맞아가지고 말이죠,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또 뭐야 감옥에 가서 갇힌 사람이 있는데 이런 분이 애국지사가 되고 향토애국지사를 붙혀놓은다면은 안되지 않습니까? 또 역사라는 것은 기록을 할 때 피상적이어서는 안되거든요. 이 양반이 일생을 살아온 그 양반의 일대기를 그려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거를 말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내용들을 기록해 가지고 유허비를 세워놓는다면은 마치 그분이 김찬제씨가 애국지사라고 생각을 한다는 얘기지요.

김영구의장

지금 나중에 제시한 문건을 읽으신 내용을 보면은 당시에 문화원장의 김찬제 유허비에 관한 내용중 참 친일을 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 것 지금 이 근거가 나왔으니 이제는 일거의 여지도 없지 않느냐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그렇죠.

김영구의장

단지 지금 임선생님은 이 유허비가 정말 없어져야 된다, 지금 있는 것도. 이렇게 주장하시는 것은 이러한 기록 확고한 증빙이 있기 때문에 더 논할 여지가 없다 이런 말씀이시죠?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렇지요. 지금 아까도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이게 ’97년도 7월 14일날 공문을 띄우고 ’97년 7월 30일날 군수님한테 다시 세우고 하겠다는 이런걸 했습니다. 그런데 ’99년도 3월 10일날 제16차 문화원에서도 “이것은 애국지사기 때문에 이것은 부지를 사서라도 세워야 된다” 이렇게 나왔을 적에 지금 동서석자에 보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말이죠. 개인 기록을 썼다면 얘기할 필요도 없는거예요. 향토애국지사다, 애국지사다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고 감옥에 있는데 7년동안이나 재판기록에서 이런 공수를 한 분을 어떻게 향토애국지사라고 해서 유허비를 건립을 해야 되느냐 이건 말도 안 되지요.

김영구의장

임선생께서는 당시 문화원에 관여 하셨습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했습니다.

김영구의장

그러면 김찬제유허비건립의건을 상정했을 때 자리에서 회의를 같이 하셨습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안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잘못 된걸 알고 이사직을 사표를 낸 사람입니다.

김영구의장

당시까지는 이사이셨는데 이런 문제로 서로 견해차이로 인해서 이사직까지...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아니 거기 이거 상정한 것도 모르고 이게 이사회에서 상정 했다고 그러는걸 전 모르겠어요. 저는 이사회에서 상정한 것도 모르고 이러한 잘못 됐기 때문에 저는 그 자리에서 사표를 내고 이것을 거론하기 시작한겁니다.

김영구의장

그러면 당시에 추진위원회가 생긴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추진위원회가 생긴 것은 알고서 사퇴하신 겁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몰랐지요.

김영구의장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셨구요?
고인

참고인

임종선 전혀 몰랐지요, 예.

김영구의장

그러면 당시에 까지는 문화원에 적어도 이사셨는데 소위 이사이신 분이 지금 말씀으론 이 문제 때문에 이사직까지 사퇴를 하셨다는데 그런 추진위원회가 구성 된 것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몰랐어요, 예.

김영구의장

그럼 한가지만 더 물어 보겠습니다. 문화원에 어떤 사업이 문화원에서 거론되서 모든 책임이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면 그 추진위원회에 있을 수 있습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추진위원회요?

김영구의장

예. 지금 저희도 당시 회의내용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만 문화원의 이름이 아니고 “추진위원회 이름으로 건립하는 것이 좋다.” 어쨌든 거론은 문화원에서 시작이 돼 놓고 거기서 거기 있는 분들로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이 되고 그러니까 모든 그다음에 건립을 하거나 하여튼 철거를 하거나 모든 책임은 추진위원회에서 하는 것이 옳다. 이런 생각은 가질 수 있습니까? 당시까지는 문화원이사로.
고인

참고인

임종선 그런데요, 추진위원회에서 해 가지고 추진위원회에서 건립했다면은 문화원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성이 없지요. 그러나 다만 문화원이 이것을 시행을 했기 때문에 문화원이 책임이지요.

김영구의장

그러나 당시 문화원 회의록 내용은 모 이사께서 “문화원의 이름이 아니고 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건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나중에 추진위원회에 넘기기로 확정함을 의장은 선포를 했습니다. 당시 회의의장은. 이런 것이 과연 문화원하고 별개의 관계가 되는 것이냐? 당시까지는 문화원 이사이셨다니까 물어 보는 겁니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아니지요, 문화원에서 공문을 시행 했으면은 문화원에서 끝까지 책임이지 문화원에서 시행을 해 놓고 “추진위원회에서 했기 때문에 추진위원회에 넘긴다” 그것은 말도 안 됩니다.

김영구의장

그건 그때 까지의 문화원 이사로써의 견해이십니다?
고인

참고인

임종선 예.

김영구의장

예, 알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더 질의하실 위원님 계십니까? 질의하실 위원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이만 질의를 마치겠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다음은 유허비의 존치를 주장하는 참고인을 모시겠습니다. 참고인께서는 답변석에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안녕하십니까? 출생은 창대리 기산리에서 출생한 서장석올시다. 현재는 서울 살고 있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진행에 앞서 항상 저희 양평군의회 발전을 위해 바쁘신 조언과 질책을 해 주시고 또한 바쁘신 중에도 본 특별위원회에 출석해 주신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참고인께서는 이 자리에 오신 것은 김찬제유허비 존치를 위해서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참고인의 진술이 끝나신후 위원님들의 질문이 있으실겁니다. 상세하게 정성껏 답변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간략하게 본인소개와 더불어 김찬제씨 유허비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출생은 창대리에서 출생해서 서울가서 지금현재 답십리에 살고 있는 서장석이라고 합니다. 김찬제선생님의 유허비 관계로 해서 여러분들한테 늘 이렇게 괴로움을 끼쳐 드리는 것 같고 또 수고를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특히 문화원에 대해서도 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 유허비를 세우게 된 동기부터 제가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서울 살면서 창대리 기산리 출생의 70대 나이먹은 사람끼리 모임이 있어서 그걸 기산회란걸 조직을 해 가지고 근 20여년을 쭉 내려 왔습니다. 7, 8명이 그렇게 있었는데, 거기서 늘 말씀이 모이면은 김찬제선생님에 대해서 얘기도 있었고, 좋은 얘기 이런 얘기를 듣고 오던차에 또 저희 아버님께서 늘 말씀이 김찬제선생님의 말씀을 많이 하시고 언제든지 김찬제선생님 사는대로만 살아라, 그분의 모든 행적이라든지 저걸 말씀을 하셔서 저희 여러 형제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리 기산회에서 늘 얘기가 그런 분을 갖다가 그대로 후세에 어떤 뜻있는 기념비 같은거라도 하나 세워야지 이대로 이래서 우리가 못 세우면 세울 사람이 없다. 그러니 나이 먹은 우리들이 하자. 이래 가지고 기산회에서 늘 추진을 했는데 역시 여건이 제대로 맞지를 않아서 시일을 끌다가 ’94년인가, ’93년도에 결국은 세운다는데 뜻이 모아졌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거기서 세우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역시 재정문제라든가 그런게 여의치 못해 가지고서, “그럼 재정은 내가 댈테니 여기에 대해서 협조만 해다오” 이래 가지고 기산회에서 쭉 나오다가 나오던 기산회 회원들이 하나, 둘, 하나, 둘 고인이 됐어요. 그래서 세 사람이 고인이 되고 지금현재 기산회 남은 사람은 세사람밖에 없습니다. 역시 남은 사람 세사람이 그당시에는 다섯사람이 있을 적입니다마는 현재는 세사람만 남았습니다만 세사람이 모여 가지고서 “그러면 하자” 이래 가지고 예산을 300을 세워 가지고 유적지로다 해서 현장, 돌아가신 현장에다가 세우는게 어떠냐 이래 가지고 여러 가지로 의견이 맞아 가지고서 비문이라든지 그런걸 다 만들어서 할려던 찰라에 마침 제가 문화원에 고문직으로 돼 있어서 우연한 기회에 문화원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할려고 그러는데 비석을 세울려고 그런다”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당시에 원장으로 계시던 양혜석원장께서 자기도 잘 안다. 자기 아버님, 양원장의 아버님하고 김찬제선생님하고 막연한 친구사이였던 것도 저도 압니다마는 친구였었고 그분의 말씀을 늘 아버님께서 하셔서 참 그분이 훌륭한 분이고 지방면민을 위하고 현지의 일본 사람들하고의, 그당시의 일본 사람들하고의 상당히 면민을 위해서 일본 사람들하고 투쟁한 얘기도 하고 참 여러 가지 말씀을 하는걸 들었다. 그러니 이런 분을 같다가 어떻게 개인 기산회에서 한다는걸로다 할 수 있느냐! 이것은 문화원에서 하는걸로 해 가지고 이왕 예산이 섯다니까 예산을 갖다가 합쳐 가지고 문화원에서 합쳐서 한번 뜻있는 사업을 해 보자 하는 뜻에서 그때 발족이 된겁니다. 원인은 그렇게 해서 된 겁니다. 그래 가지고 아까도 좀 말씀 하시더구만 우리는 과거에 그런 근거 있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순전히 구전에 의해서 이게 서로 말로 구전에 의해서 내려온 그분의 선행, 그분의 덕 그것만 알고서 여기저기서 알고, 듣고 발굴해서 그 분이 훌륭하다는 것만 알고서 그대로 추진해서 그당시에 문화원의 원장하고 문화원 직원 여러분들하고 같이, 저도 또 거기 고문으로 있으니까 어떻게 참석을 해서 좋다 저도 역시 찬성을 해서 그렇게 진행이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추진위원을 해서 서울에 아는 사람들, 그분에 대해서 대충 아는사람들 찬동시키고 또 고향에 양평에서 아시는 분들 찬성해 가지고 아마 근 100여명이 찬성을 해서 애국지사라는 명칭을 넣어 가지고 했습니다. 저희도 꼭 애국지사를 넣는걸 바라는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행적으로 봐 가지고는 애국지사로 넣어도 충분히 애국지사 될만한 분이니까 넣어야 되겠다 하는 뜻에서 넣은거지.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훌륭한 덕 있고 인생을 올바르게 살았다는 그것 하나만 가지고 그분을 추모하고 숭배했던 것 뿐이지 과거지사는 전혀 알 필요도 없고 알라고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때 까지 내려왔던거고 그러다가 어떻게 되서 비석을 철거 했는지 자체도 전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로써는 왜 철거가 됐는지도 모르고 문화원에서도 좋은 방향으로 하겠다, 하겠다 했고 또 저도 그렇게 바라고 그래서 현재까지 내려왔던 것 뿐입니다. 꼭 그 분을 갖다가 애국지사다, 독립투사다 그렇게 해서 그분을 추앙할려고 그런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그분이 훌륭하게 사람답게 살았다는 것, 우리 전체의 우리 동민이라든지 창대리 주민이라든지 연세잡수신 분들은 그분이 훌륭하다는걸 이구동성으로 칭찬합니다. 또 제가 이날이때까지 사람답게 산것도 그분의 훈덕이 큽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도 늘 말씀 하시면은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늘 하시는데 언제든지 김찬제선생의 말씀을 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분을 제가 언제나 누구보다도 그분을 저는 숭배하고 훌륭한 분이다란걸 느껴 가지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별 딴 말씀은 여기 정봉호선생이 오셨는데 그분이 과거에 행적을 잘 아십니다. 그때 같은 면에 근무도 했었고 그래서. 그분의 증언을 좀 들어 주신다면은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제가 한 말씀만 좀 질의를 하겠습니다. 당초 유허비를 건립할 당시에 아무런 문제점이 전혀 없었습니까, 여기에?
고인

참고인

서장석 그 당시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세울 때 까지도 없었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그렇다라고 하면은 건립을 하면서 후세들이 한번도 참석을 안 했다는 말씀이 계신데 그런 말 들으신적 없어요?
고인

참고인

서장석 후세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영호

이영호위원장

그 후손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왜요, 후손이 여기도 와 있습니다마는 후손이 왜 참석을 안해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유허비 발족할 때 후손들이 참석을 하셨다고요?
고인

참고인

서장석 그럼요 유허비 제막식 할 때도 왔고 그뒤로도 늘 참석하고 꽃다발도 갖다가 저걸한걸 알고 같이도 하고 주위에 나무 심은 것도 후손이 와서 나무를 심었는데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그래서 아무런 문제점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때 당시에 바로 건립을 하시게 된 동기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영호

이영호위원장

다른 위원님 질문하실 위원님 안 계십니까?

박선배위원

제가 한가지만 여쭤볼께요. 지금 여기 아까 서선생님이 쓰신 것을 보면 그때 당시에 서선생님 연세가 2살이라고 합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어렸습니다. 그때 저는 1살이지요, 24년생이니까.

박선배위원

그래서 아까 설명을 하신대로 아버님이나 거기 어른들이 김찬제선생님의 공로나 이런걸 칭찬을 하셔서 여태까지 그 유지를 받으셔서 세상을 살으셨다고 그러는데 지금 저희도 왜정 36년에 끝날 무렵에 태어나서 어떤 저건 모르고 어렵게 살았다는 것만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 지금 한국사람이라면 지금 연세를 잡수신 분이고 왜정 36년이면 일본에 가서 축구 경기를 하든지, 농구 경기를 해도 그것만은 이겨야 된다는게 우리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 문제가 나오냐 하면은 일제치하 36년에 그만큼 쓰라린 우리 국민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가서 운동경기라도 일본놈만큼은 이겨야 된다는게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절실한 요망사항입니다. 다만 저희가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다면, 뭐 이건 제 사견입니다,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다면 왜정 36년에 그네들이 얼만큼 우리 국민을 가지고 난폭하게 했습니까? 말단 면서기 하나가 사쿠라 단장을 들고 가마니 바닥에서 가마니 한짝만 들추어도 뒤통수에 골통을 들이 까고 처참한 행동을 했던 것이 바로 왜놈들이 앞잡이 면서기입니다. 지금도 몇몇은 살아 있는 사람도, 그 때 왜정때 면서기를 하던 사람도 살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 보면 지금도 적대시 하는 형편이란 말이예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 왜정치하에서 면장을 지내면서 어떤 사적으로 우리 면민들한테 군민들한테 어떤 제공을 했는지 모르지만은 그게 그렇게 가능 했겠느냐 이런 부분이 상당히 의혹이 가는 부분이 아니냐! 그리고 아까 의장님도 임종선씨한테 유허비, 말씀하신 유허비가 어떤 비에 해당되는거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아까 여기 보훈청에다가 안찬희국회위원이 문화원에서 거론이 돼 가지고 “야, 이런 분은 이게 그냥둘게 아니라 훈장을 신청해서 훈장을 줘야 된다” 이래 가지고 안찬희국회위원이 서둘러 가지고 보훈처에 신청을 했더니 “이건안된다” 이래 가지고 빠꾸가 됐다 이말이예요.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그렇습니다.

박선배위원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여기서 동네에서 추모를 하는 김찬제지 이것이 기록상으로 어떤 면으로는 보훈처나 어떤 역사상에 기록이 돼 있는 부분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다 이거예요. 서면상으로 책자로 있는 것은 김찬제는 이름 석자가 기재된게 없다 이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양평군에서 동네면 동네 여기서 뜻이 있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애국지사가 아니라 양평의 군민을 위해서 했다는 그런 식으로 해서 이름을 유허비로 달았지 않느냐 전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아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그 양반이 어떤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마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 했을 적에는 왜정치하에서 면서기만해도 사구라단장을 일본놈의 칼 휘둘러 가면서 그 설쳐 가면서 우리 같은 국민을 괴롭히는 그 시대였는데 면장이라는 감투를 쓰면서 그것도 1, 2년도 아니고 7년씩 장기근속을 해 가면서 진짜 우리 양평군민을 위해서 뭔가는 했을 수 있겠느냐, 가능 했겠느냐? 이렇게 의아심을 저 자신도 품어 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서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서장석 다 이해가 갑니다, 말씀하신게. 우리는 구전으로만 들었지 실제 이런 서류상이라든지 어떤 책자에 오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 이분께서 각 동네마다 그때는 갈산면이지요, 갈산면에 있으면서 면에 동네마다 야학당을 만들어 가지고 그 야학당에서 공부한 사람들을 몇사람 만났어요. 난 그래서 그분들이 야학당에서, 그때는 언문이라고 그러지요 지금현재 국문입니다만 언문을 깨우쳤다, 못 했다 하는 사람들이 말을 내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 분이 각 동네마다 특히 우리 기산리 창대리 부락이 여럿인데 빈 사랑마다 야학당을 만들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가르킬 수 있는 사람을 선출해 가지고 배워야 된다, 알아야 된다 해서 학생들, 뭐 학교 다니는 사람은 말고 학교 안 다니는 여자들이나 과연한 여자들이나 그런 사람을 많이 가르쳐 가지고 배웠다는 사람, 우리 누님도 거기서 배워 가지고 “나도 거기서 언문을 깨우쳤다” 그런 얘기도 들은 얘기가 있고 그렇지 어떤 문헌이라든지 그런데는 그분이 올라있는지를 제 자신은 모르겠습니다. 또 그걸 갖다가 알라 그러지도 않았고. 다만, 들은 바에 의하면 믿을 만한 분들이, 또 저희 종형에 서태석씨라고 있었는데 그분도 참 많이 면에서 다니시고 그랬어요. 그분의 말씀도 그렇고 믿을만한 분들의 말씀이 다 이구동성으로 “참 훌륭한 분이다. 그분은 참 누구나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업적만 따라서 행동한다면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걸 참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런 분이라면은 후세에 자라나는 아이들한테도 교훈을 시키기 위해서라도 뭘 하나 만들어 놔야 되겠다 해서 늘 우리 기산회에서 얘기가 되다가 ’94년도에 되서 비석이나마 세울려고 했던거지요. 어떤 그분을 갖다가 이외에 없는 일을 갖다가 발굴하면서까지 우리가 모시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찬성을 하시면 지금이라도 우리가 찬성을 하지만 아무리 세우고 싶어도 찬성을 안 하시고 반대하는 분이 계시다면은 지금도 그분을 갖다가 굳이 비석을 세우고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동네에다가 하나 하고 싶은 생각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말리지 않으시겠지죠?

박선배위원

그렇지요, 제가 생각하는면은 이것은 결과적으로 국가적인 보훈처나 국가적인 서류로다가 입증이 되는 애국지사라면 모르는데 이건 어떤 조그만 면장을 하면서 면단위니까 그 리에서 면에서 이 양반이 대단한 양반이다해서 어떤 하면 모르는데 이걸 문화원에서 거국적으로 하다가 보니까 이런 저게 나온 것 같은데 하여튼 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그렇게 교훈을 배우셨고 그렇게 아시는건 잘못은 아닙니다. 뭐 그렇게 해서 이때까지 세상을 반듯하게 사셨다고 그러는데 더 드릴 말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또 한가지는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난 당사자한테 직접 들었는데 김장홍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사람은 이보다도 한 20살 위이지요. 그러나 그당시에는 같이 이렇게 다녔는데 그사람한테 몇번 들었어요. “내가 만세 불르러 나갔다가 붙들려 죽을 뻔 한걸 갖다가 김찬제 선생님 덕으로 내가 살아났다”고 그래 누구누구 세사람을 꼬집으면서 “그래서 내가 언제나 그분의 은혜를 잊지 못 하겠다고” 그것은 아주 그사람한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그 분이 한 그때는 17세, 16세 내가 그때 한 10살 정도 됐고 한 10여살 위니까. 그분한테 내 그런 얘기를 그건 직접 내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내가 만세 부르다가 들켜가지고 일본놈한테 끌려가다가 하는걸 날 살려줘서 내가 또 살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지 그 분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그게 누구누구 세사람이라는걸 내가 알고 있는데요. 그건 실지로 내가 들은거고요. 그리고 야학당을 만들었다는 것은 거기에서 배우고 또 그 분 가르킨 분이 또 있습니다. 김정각씨라고 그 분이 선생으로다가 그분이 서당을 만들은걸. 두사람이서 서당을 했었으니까요. 그래서 거기서 언문 그때는 언문이죠. 언문을 가르치고 그래서 “배워야 된다. 알아야 된다”해서 그분이 다니면서 서당을 개설을 많이 야학당을 개설해 가지고서 문맹자를 퇴치해 줬다 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박선배위원

한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면 지금 이게 반대파 이걸 보증해 주는 파 이런식인데 아까 선생님이 서두에서 말씀하신대로 지금도 굳이 이것을 꼭 어디다 세워야 되겠다고 고집은 안하겠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박선배위원

우리가 어떤 여력이 있으면 우리 나름대로 해서 어떻게 조그맣게 세우면 맞지는 않을 것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 나중에 어떤 결론이 선생님은 다른 이의는...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없습니다. 처음서부터도 전 그렇게 생각지를 않았고 그분을 애국지사, 독립지사다 그렇게 모시고서 비석을 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또 애초에도 처음에도 그랬고요. 그러다가 일이 커지고 보니까 그분 내력을 너무나 잘 아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그분들이 그렇게 해서 침소봉대된거지요 조금도 무슨 그분을 욕심을 내거나 그런건 없습니다.

고기섭위원

제가 한번 물어볼까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말씀하시죠.

고기섭위원

서참고인께서 지금 말씀해 주시는 동안에 야학당 운영을 하셨다, 아닌게 아니라 선구자 역할은 하셨다고 인정은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세 삼창을 하는데 그 사람 덕분에, 김찬제씨 덕분에 세사람이 살아났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야학당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가짐을 가지신 분이라면은 사실 만세 삼창을 앞장서서 끌고나가야 될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분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내가 만세 부르러 갔다 내가 살아나서 그분한테 고맙다" 그럴려면 만세 삼창을 부르지 말았어야죠. 사실 그 부분에 대한 답변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살아남으신 분들의 고마움을 그대로 얘기하셨으니까 그걸 그대로 전달받으시고 지금에 와서 보셨을 때는 "아 그 분들이 우리 선대들을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었구나!" 해 가지고 고맙게 느낄지는 모르지만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야학당을 운영할 정도로 선구자 역할의 위치에 섰다면은 당연히 그 어려운 시기에 김찬제씨가 앞장서서 만세 삼창 부르러 왔던 사람들 박수 쳐주면서 “당신같은 사람들이 애국지사다. 당신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살아나가지 않겠느냐”고 얘기할 수 있는 입장이 됐어야 될 입장이라고 보는데 대신 나간걸 갖다가 다시 가로막아주고 “만세 삼창 부르면은 죽는다” 이것은 그걸 찬양한다는 것은 잘못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제가 본게 아니니까. 불르고 붙들려가는 것을 끄집어서 살려줬다는 얘기만 들었지 부르는걸 왜 막았느냐 뭐하느냐 그런 얘기는 모르겠습니다.

고기섭위원

아니 그러니까요,
고인

참고인

서장석 부르고 온 사람을, 붙들려 가는걸 구제해 줬다는걸 내 말씀을 드린거죠. “그분 때문에 내가 살아났다” 그 얘기였었어요.

고기섭위원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그래서 만세 삼창 불르고 가는 사람을 김찬제씨가 가로막아줘서 살아남았다고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고인

참고인

서장석 아 붙들려 가는 사람을 갖다가 끄집어서,

고기섭위원

아니 그러니까. 제가 그 말씀을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살려줬으니까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맙다고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고인

참고인

서장석 그렇지요.

고기섭위원

예.

김영구의장

위원장님! 발언권 주시겠습니까? 아직 안 끝나신건가요?

고기섭위원

예, 그러니까 지금 자꾸 반복되는 말씀을 자꾸 되풀이하셔서 말씀하시니까 그러는데 붙들려가는 사람일지라도요, 그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정도라면은 야학당 운영은 앞에서 문맹자들 퇴치시키는 것 아닙니까? 문맹자 퇴치시키고 머리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 머리에 입력시켜주는 것인데 그분들이 진짜로 애국지사고 국가를 위해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은 그분들이 붙들려가는걸 막는 것도 막는것이지만 자기 자신도 앞장서서 만세 삼창에 가담을 했어야 된다 이 얘기입니다. 그걸 갖다 무조건 막아준 것만 고맙게 생각한다는게 잘못된게 아니냐 이런 얘기예요.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나 그걸 보지도 못하고 들으지도 못했으니까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분이 면장직에서 만세를 부르시기야 하겠습니까마는 글쎄 모르겠습니다.
필수

문필수위원

그러니까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이 양반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라는 것을 강조하시는거죠?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그건 제가 보증하겠어요.
필수

문필수위원

그것을 강조하신거죠?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또 정봉호선생님이 계시니까 그 분의 증언을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의장님! 질의하시죠.

김영구의장

예, 서선생님께서는 당시 건립위원회 추진위원장님으로 계셨죠?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김영구의장

그런데 물론 지금 여기 와 계시는 분의 말씀 또 보내 주신 서류나 이런걸 봤을 적에 이게 어떤 문건화 된 참 기술된 것은 없지만 연암선생께서는 당시에 면장으로서 참 남다르게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개설이나 아니면 풍요를 위한 물산장려나 참 여러 가지를 하시면서 또 참 기개가 있으신 분이 일인 치하에서 붓을 잡고 있는 것을 통한 삼아서 울분도 많이 삭히시고 하셨다는 그런 것이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는건데 사실 구전도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참 그렇게 훌륭하신 분을 다 구전으로 전해 들으시고 당시에는 사건이 얼마 안됐던 것이니까 하신 말씀이 정확하시겠죠?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김영구의장

그래서 이런 분은 참 이렇게 유허비를 세워드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게 얘기가 점점 확대되어서 유허비까지 건립하시고 위원회까지 구성되고 위원장까지 하셨었는데요, 그 때에 만약에 이것을 하실 적에 아까 반대의견을 개진하신 임선생님이나 그런 분들이 지금 끝까지 추적을 해서 가져왔습니다마는 당시에 형사기록부를 만약에 그때 보셨다면은 그래도 이 유허비는 건립이 됐을까요?
고인

참고인

서장석 저는 했을 겁니다. 그건 저는 지금 오늘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만약에 그걸 봤다 하더라도 저는 저 나름대로의 복안이 있고 또 그 분을 워낙이 내가 숭배를 하고 좋았기 때문에 무슨 애국지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분의 다른 문구를 써서라도 비석은 유족비라든지 해서,

김영구의장

아 문제는 지금 향토애국지사 연암 김찬제선생 유허비 이렇게 됐으니까 문제가 되는거죠, 그냥 연암 김찬제 이렇게 나갔으면은 문제가 아니죠. 향토애국지사라는게 써있으니까 아마 이분들이,
고인

참고인

서장석 알겠습니다.

김영구의장

어떻게 애국지사냐 참 누가 봐도, 더군다나 당시 위원장이셨던 서선생님 말씀도 “참 이렇게 훌륭하신 분은 우리가 후세에 남겨서 후세인들도 보게 해야 된다” 이런 뜻으로 하셨다 그랬는데 만약에 이게 모르고 넘어갔을 경우에 후세에 참 누가 또 쉬운말로 김찬제 유허비를 논고를 해서 석사학위를 받는다든가 무슨 박사학위를 받을 요량으로 준비하다 그때에 만약에 이게 튀어나왔다면은 그런 후세의 심정은 또 어떻겠느냐 이런 것도,
고인

참고인

서장석 그렇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김영구의장

그래서 지금 그럼 서선생님 말씀은 당시에 이런 문제가 제기됐더라도 그분의 유적비는 세우시고 싶은 마음은 항상 가지고 계셨고 향토애국지사라는 글귀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은 앞으로 향토애국지사는 삭제하고,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맞습니다.

김영구의장

이분의 훌륭한 이런 것을 하다 못해 그분 향리라든가 어디에 세워주고 싶은 마음은 여태도 가지고 계시고 또 그것까지는 안 막을 것이냐 이런 말씀이시죠?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예.

김영구의장

예, 알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더 질의하실 위원님 계십니까?

박선배위원

지금 현재 여기 비문이 금속문이죠? 이게 앞에 정면 비문뒤에 지금 한 비문 원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고인

참고인

서장석 원본이 어디 있는데요. 있을 겁니다.

박선배위원

그걸 한번 있으면 한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영호

이영호위원장

그러시고 아까 말씀중에 철거된 이유를 모르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고인

참고인

서장석 예, 전 지금도 정말 참...
영호

이영호위원장

저희 자료에 보면은 건립 당시에 아까 우리 말씀을 하셨지만 추진위원장이셨고 문화원에서 건립을 할려고 그렇게 노력을 해서 건립을 하시게 됐는데 이 철거를 문화원에서 했어요. ’95년도 7월 27일날 철거를 했는데 선생님이 이걸 모르시고 계시다는 것은,
고인

참고인

서장석 철거한 것은 압니다마는 왜 철거한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죠. 대충은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문화원 내분관계가 있어가지고 그랬다 이랬다 그런 말이 들리는데요 그걸 뭐 제가 여기서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고 그저 그랬다는데 또 역시 내가 그걸 들고 일어나면 문화원이 또 곤란하고 그래서 저는 그냥 함구무언하고 있었습니다. 대충 그렇다는 것을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또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내 나름대로 다시 하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또 양혜석원장하고는 또 세교관계가 있고 양혜석씨 아버지하고 저희 아버지하고도 또 막연한 사이고, 옛날에. 늘 우리 사랑에 와 노시고 또 김찬제선생님하고 우리 아버님하고도 늘 사랑에서 계시고 늘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상당히 막연한 사이시거든요, 양원장 아버지하고도. 그러니까는 그런 관계도 있고 그래서 참는데 다 서로 좋지 않나 해서 대충은 알았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고맙습니다. 이렇게 아주 성의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우선 정봉호선생님의 증언을 한번 들어주시죠. 시간이 어떠실지.

김영구의장

저희는 이걸로 됐어요. 지금 증언이라고 그러셨는데 증언이라고 하기로는 좀 그렇고요, 이것만 하고 참석까지 해 주신걸로 다른 위원님들도 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그러시면은 이분이 하신 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도 있는게 있는데 들으시고...

박선배위원

쉬었다가 하시죠.
고인

참고인

서장석 김찬제선생님에 대해서 재미있는 얘기를 하실 분이 계십니다. 아주 실지로 아주 느끼시고 큰 자제님하고 대화하고 만나신 일도 있고. 10분만 시간을 주시면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저희는 존폐여부를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휴식후에 듣는걸로 하겠습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아 그러세요, 그러면. 휴식후에 꼭 좀 그 분의 증언을,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휴식을 위해서 10분간 정회를 하겠습니다. 정회를 선포합니다.

14시37분 회의중지

14시54분 계속개의

성원이 되었으므로 회의를 속개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정봉호선생님께 10분간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고인

참고인

서장석 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봉호선생님이 연세가 많으십니다. 귀가 잘 안들리십니다. 그 점을 양해해 주시고 질문하시면 좋겠습니다.
정봉호 이 자리에 죄송합니다. 이 사람은 용문면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제 발상지가 왜정 때 양평군청 재무계올시다. 그래서 줄거리 말씀드리기 전에 저에 대한 말씀을 소개를 올릴려고 합니다. 다름 아니라 제가 발상지가 양평군청에 한 1년 있다가 상사들이 면행정을 가서 빨리 배워가지고 오라 해 가지고 강하면으로다가 발령을 받아서 거기가서 4년동안 하고 있는 동안에 제가 일을 남처럼 훨씬 내가 잘 한다고 해서 이게 용문면장이 와서 제 고향으로 데려가야겠다고 해서 용문면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8년동안 있다 거기서 해방을 당해 가지고 이듬해 해방되던 해에 폭동이 제일 심한 데가 용문면이 올시다. 그때는 제가 용문면의 면직원이 한 40명이 있었는데 그 때에 왜정하에 그 무서운 악독한 그 밑에서 36년동안이라는걸 우리가 다 같이 지내올 동안에 같은 직원에서 그때 쌀 공출이다, 가마니 공출이다, 인력 공출이다 또는 심지어 가마솥까지도 이렇게 해 가지고 거기에 담임자가 좀 심하게 면민들을 괴롭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폭동이 일어났는데 그 사람을 잡을려다가 잡지 못해 놓치고 그 사람 이름이 지금 살았으면 86살이예요. 제 나이는 지금 87살이올시다. 이렇게 나이를 먹기 위해서 살았는지 살기 위해서 나이를 먹었는지 이걸 분간을 못하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멀쩡한 인물이 이렇게 되다 보니까는 이목구비가 다 망가지고 이미 이모양이 된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래서 해방후에 거기서 인심을 얻은 사람들이 네사람이 남아가지고 면사무를 마저 정리한 다음에 발령이 나기를 강상면 부면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부면장 3년을 하고 면장 1년을 하다가 6.25를 당했어요. 그래가지고 6.25후에 다시 그때 군수가 김인근군수가 제가 두 번째 만나는겁니다. 먼저 재무계에 있을 적에 그 양반이 징수부에 석관담임자로 와 있었고 저는 강상면 면장으로 있을 적에 그 양반 두 번째 만나서 6.25를 당해가지고 다시 수습한 후에 군청으로 또 들어갔어요. 왜정 때 군청을 두 번 들어가고 해방해서 군청을 한번 들어가서 군청에서 그럭저럭 한 7년동안 있다가 또 어떻게 돼가지고 경기도지사 그때 최은길씨 시절입니다. 다시 불려가서 도로다 발령이 나가서 도의 문전과에 있다가 서무과 인사계에 가서 종사하고 있다가 다시 교육위원회가 자치제가 생기면서 교육위원회가 따로 떨어져 나갈 적에 제가 교육위원회로 넘어가서 거기서 61살 ’73년도 12월 31일에 종지부를 찍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면은 왜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여러 위원님께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군청 징수계에 와 있을 적에 제가 20살이었어요. 그래서 한 몇 달동안 근무하다 보니까 이 김찬제씨에 대한 개죽음 했다는 것 이것이 모여 앉으면은 쑥덕공론이 되었더랍니다. 그래서 난롯가에 앉아서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니까는 이 양반의 그런 것 없이 일본놈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게 이게 뼈에 사무치고 그 때는 배일사상이 최고도로다가 올라가서 왜놈들이 아주 그냥 젊은사람 20살, 22살 그 청년시기에 전부 순을 잘라가지고 오나가나 이만한 꼬투리라도 있으면 잡아다가 유치장에 집어넣고 고문을 했습니다. 저도 군청에 있다가 이틀동안을 가서 고문을 당하고 왔습니다. 왜냐?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니가 어떻게 여기와서 공직에 와서 사무를 보느냐?” 하는 그런 취지로다가 당했고, 그 다음에 내놓고 바로 또 올라갔어요. 서울로 올라가서 있다가 다시 또 내려오라고 그래가지고 내려와서 그때 김인근 군수했던 사람이 석관으로 앉아있을 적에 그때에 왜정 때에 가옥세가 처음 신설될 적이올시다. 그때에 소란면이 양평으로 있을 적에 개군면은 여주군에 그냥 있었고 그때 제가 소란면을 담당해서 면담당자하고 저하고 보조자 하나 세사람이 해 가지고 전국적으로 가옥 식량을 전부 하게 되던 해에 거기서 두달동안이나 지냈습니다. 이건 가외 얘기지만 본부까지 가서 건물을 잰 일이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끝나가지고 가가지고 딱 스물여섯사람이 그때 12면에 나눠가지고 세사람이 남긴게 세사람틈에 제가 하나 들어가가지고서 나머니 대장 전부 만들어가지고 있었을 적에 올시다. 그래서 그걸로 이만 말씀을 드리고 군청에 있을 적에 제가 늘 뼈에 사무치는 것은 고 김찬제면장님의 억울한 죽음을 했다는게 이게 늘 뼈에 사무쳐가지고서 이 원인을 어떻게 좀 알아야 하겠는가 하고 거기서 선배들의 얘기하는 어휘에 그 아드님이 서무계 그때는 내무과가 아니라 서무계, 재무계 군 직제가 2개 있었어요. 그래서 재무주임에 일본사람, 서무주임에 일본사람 단 두사람이 있어요. 사회담임이 또 하나 있어, 그 때는 산업과니 무슨 재무과니 이게 없었고 서무계에서 행정 산업관계 전부 담당을 했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거기에서 김찬제씨 아드님이 서무계의 행정담임으로 있다는걸 제가 귀에 듣고 그래서 참고로 해서 “이게 기회로구나! 이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 아드님을 내가 만나가지고서 원인을 알아봐야겠다” 저보다 10여년 선배요, 연배요 또 그 양반 석관으로 있을 적에 김덕운씨라고 큰 아드님이지요. 그래서 그 분이 저를 사랑을 많이 했고 또 저를 자세하게 지도를 해서 “행정법규를 잘 알아가지고 공부해서 어떻게 임관시험을 봐라” 늘 사랑을 받아왔어요. 그래서 기회를 타가지고 이 양반의 왕방하게 가서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그래서 그 양반 숙직하는 날 숙직실에 들어갔을제, 그 때 여기 2층 목조건물 단순하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숙직실에 가서 “선생님을 뵙고 말씀을 드릴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양반이 대뜸도 하면서 “안된다. 지금 우리 아버님이 7년전에 여기서 돌아가는걸로 아직까지도 내 뒤를 미행하는 형사들이 바깥에 와 있을는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왕방하게 그런 얘기 꺼내지 말고 빨리 가라” 그거예요. 그래 할 수 없이 빨리 왔어요. 오는데 뭐라고 말씀을 하는고 하니 “이다음에 당직날 한번 만나서 얘기를 하자” 그래서 그 양반 당직날 찾아서 가니까 낮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때 소사라고 여기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박철영씨라고 그 양반이 터줏대감 으로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래서 그분 바깥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모르고 김동훈씨, 김찬제씨 맏아드님하고 제가 앉아서 어떻게 된 경우에 이렇게 억울한 무시를 당하고 우리가 암만 압박 밑에서 살지만 이거 이대로 있을 수 없지 않느냐? 어떻게 하겠느냐 말씀을 좀 해주세요. 이제 그래서 그 어른의 말씀을 들었어요. 저는 김찬제씨 얼굴도 모르고 그당시에 창대리에 사신다는 것만 알고 얼굴도 모르고 지내던 판이올시다. 그래서 맨 처음에 말씀하신게 뭔고 하니 자기 형님 면장이, 그때는 양평면이 아니라 화천면이었습니다, 면 이름이. 그래서 맨 먼저 말씀 하시는게 이장회의를 소집을 했어요. 그때 같은 치안행정, 일반행정 이게 두 기관이 똑 같이 나가는 그런 판으로 이장회의를 할려면은 집회를 하니까는 집회허가를 맡아야 됐습니다, 서에. 그래 경찰서에 이장회의를 하겠다고 신고를 하니까 회의를 해라 이거예요. 그래 가지고 이장회의를 하는데 경찰서장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여기 이장회의에 면내 유지 각 한분씩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같이 참석을 해서 회의를 하도록 해라 이거예요. 그래 가만히 김찬제면장님 생각할적에 이것이 안 됐다 이거예요, 김동훈씨 말이. 그러면 왜 난 면행정에 이장을 가지고 회의 진행할 책임밖에 없지 유지를 불를 권한이 없다 그래서 거절을 했어요. 그래서 이사람네가 거기서 아옹해 가지고 서에서 그냥 돌아갔어요. 그다음에 또 뭘 요구하고 왔는고 하니 경찰서장의 관사를 개축할테니 여기에 대한 인부부역을 각 동네에서 내줘야 되겠다 이것을 또 와서 청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어른이 그때 거기서 나서서 한마디로 일꾼을 부역을 낼려면은 너희가 도에 경찰국에서 영달되는 예산 가지고서 임금을 지출해야지 왜 면장보고 인부를 경찰서장 관사 짓는데 왜 인부를 동원을 시키게 하느냐! 여기에 또 두 번째 감정을 산거예요. 그다음에 여기에 대한 경비를 조달할 도리가 없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예산을 만들어 오겠으니까 유지를 또 불러 달라는거예요. 여기서 이 양반이 또 거절을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뭘로다가 얘기가 돌아가는고 하니 “면내에 악질분자 또는 좌익분자, 공산주의자, 배일사상을 무겁게 가지고 있는 자들을 색출해서 내줘야 겠다” 그거 부탁을 받았다 이겁니다. 그래서 면장이 하도 엄청난 부탁이래서 “이것은 마땅히 당신네 소관인데 왜 면장보고 이런 어려운 일을 갖다가 맡겨서 해야 하겠느냐” 여기서 이걸 전부 다섯 번인가, 네 번인가 전부 거절하고 이사람네들이 이것을 속에다가 갈구자리를 만들어 가지고 그 양반이 면장을 그만두고 당신 고향 창대리 가서 여름에 더위에 동네 잔치를 베풀적에 이 서 직원들을 아마 초대했던 모양이라. 그때 토사라는 경부가 있었어요. 경찰서장이 같이 가서 있는데 여름에 뭐 때문에 엽총을 매고 촌에 갑니까? 짐승을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총을 매고 갔다 합니다. 김동훈씨 말씀이. 그래서 느닷없이 회식장소 알아서 발사를 해 가지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얘기 한마디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우리 민족혼에 뼈서린 얘기입니까? 저는 아직까지도 그분이 돌아 갔지만 젊어서 부터도 오늘 지금 이시간까지도 그 어른을 민족혼에 쌓여서 돌아갔다라고 여기에 대해서 저는 절실히 느끼면서 숭배하고 있는 이것이 올시다. 이상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아주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으로 김찬제유허비에 대한 참고인 진술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휴식을 위해서 20분간 정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회를 선포합니다.

15시09분 회의중지

15시31분 계속개의

성원이 되었음으로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의장님 아까 말씀하신...

김영구의장

위원장님! 임종선선생님을 다시한번 참고인석에 요청합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임선생님. 질의 하시지요.

김영구의장

예, 고맙습니다. 사실 그동안 양평군의 역사 바로잡는 쪽, 또한 여러 관계에서 많은 물심양면으로 애써주신 점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리고요, 본인이 지금 참고인으로 계시는 임선생님과 또한 양혜석원장님, 또 장삼현교수 또 그외에 진언이나 건의문으로써 저희 의회 위원들한테 보낸 내용중에 살펴보면은 사실상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까 감정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어느쪽에서 보면은 굉장한 신상모독쪽으로 생각되는 문구가 꽤 있었습니다. 혹시 시인 하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있다면은 제가 사과를 올리겠습니다.

김영구의장

그러니까 시인을 하십니까? 신상모독을 하신 것에 대해서.
고인

참고인

임종선 글쎄 그 부분에 대해서 제가 보고 그걸 지적을 해 주신다면은 제가 사과를 드리지요.

김영구의장

공개사과하실 용의도 계십니까?
고인

참고인

임종선 아, 있습니다.

김영구의장

예, 좋습니다. 이상입니다, 위원장님.
영호

이영호위원장

종고 선생님 안 오시나요?

김영구의장

저기 위원장님 세분은 본의에 따라서 하시는거지만 시간상의 제약이 있으시다면은 가셔도 관계없겠는데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아, 그럼요.
고인

참고인

안금식 제가 잠깐 건의...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예.
고인

참고인

안금식 제가 이것은 비문이 관계된 내용 보다도 말이지요 간단한 건의를 말씀을 올릴려고 이 책을 갖고 나왔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앉으셔서 말씀 하시지요.
고인

참고인

안금식 앉아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여기에 가지고 나온 책자들은 제천쪽에서 서술한 책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양평쪽에서 지평의병에 대한 바탕과 뿌리와 이론체계를 찾지 않고 무심결에 넘기는 동안에 제천에서는 그런걸 찾으면서 다 자기네 고장 것으로 둔감을 시켜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최근에 제천문화원에서 발간한건데 제가 지평의병사를 쓰면서 여러 문건을 보더라도 지평의병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제천의병이다, 호자의진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금그어서 바뀐 과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천에서 우리 지평의병이 장협에서 싸움을 하고 순흥에 가서 이춘영씨를 정식으로 대장으로 복위하고 종의록에는 30명만이 퇴군를 했다고 그러는데 다른 기록에는 100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월로 가 갔고 거기에 가신 괴은 이춘영씨는 중군장이 아니고 대장의 신분으로 가신겁니다. 대장의 신분으로 가 계시는건데 이게 호서의병사적이고 아까 우리 위원장님이 말씀하신 독립운동사에 보면은 이춘영씨가 대장으로 복위 됐기 때문에 병사들이 대장의 말을 안 들어서 대장을 다른 분으로 추대한다는게 유인석씨를 추대하게 됐는데요 그걸 여기 제천에서 만든 서적에는 분명히 대장인데 한문으로 “상장”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관과 장군의 말을 안들어” 이렇게 번역을 했거든요. 그런데 상장이라는 표현이 대장 밑에 도장으로 상장 이렇게 찍힌걸 찾았습니다, 국회도서관에 가서. 그래서 그 상장이 상관과 다른 장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장을 얘기하는거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표기돼 있는 상장이라는 것은 괴은 이춘영씨가 순흥에서 대장으로 추대됐기 때문에 괴은이춘영 대장을 뜻하는건데 그러면 괴은이춘영 대장이 영월까지 가고 그리고 거기서 다시 유인석씨를 대장으로 추대해서 모셨으면은 그에 창의가 아니고 개편이거든요. 분명히 개편입니다. 지평의병의 대장이 괴은 이춘영씨가 추대돼 갖고 영월까지 들어가고 영월에서 다시 유인석씨를 대장으로 뽑았으니까 지평의진의 개편이지 그것이 다른 이름으로 창의가 아니거든요. 그래 최근에 제천문화원에서 제천의병과 전통문화라는 이런 책자를 만드는데 이창식교수님께서 여기다가 “12월 24일 호자의진은 깃발을 높이 걸었으니” 하고 이렇게 이름을 호자의진이라고 지칭을 해서 제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찾아 가겠습니다, 제천을” 그리고 전화 드리고 이 “호자의진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고 여기 표기해서 기록하셨는데 이 사료의 근거바탕은 어디서 근거한건지 가르쳐주십시오. 제가 가르침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의병사에 관심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기 원하니까,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했더니 저 한테 양해를 구 하시면서 “이게 어떤 사료에 근거를 둔게 아니고 그냥 들어서 쓴거니 이해해 주십시오” 이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것이 그냥 이대로 도서관으로 유출돼 돌으면은 이게 그냥 이대로 굳어 버리는게 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오늘 여기와서 여러 위원님들, 또 우리 김영구의장님 아주 해박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시고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일관해서 이렇게 청취해 주시는데 너무 감명을 받았구요. 또 더군다나 오늘의 특위 모임은 역사를 중심으로 해서 모인 모임인데 경기도 전체를 보더라도 의회에서 역사를 중심해서 특위가 구성된데는 거의 없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돼 집니다. 이렇게 볼적에 저는 양평의 정신적인 지주와 바탕을 찾는데 100년 역사를 두고 우리 특위가 구성되서 위원님들이 이렇게 이끌어 주시는데 존경심과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요 저희도 양평도 이런 사료와 근거 바탕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이더라도 위원님들이 앞으로 관심을 가져 주시고, 또 이것은 경제가 뒷받침 되지 않고는 절대 이룩 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역사적인 뿌리와 바탕을 찾아 놓지 않고는 양평의 뿌리가 설수가 없거든요. 조금 곁들여 말씀을 올린다면은 지난 7월달에 저희가 여기 구완회교수께서 엄연히 제가 2년을 걸려서 집필위원들하고 산을 찾았습니다. 맥캔즈가 100년전에 의병사진을 아주 걸출한 명작 두장을 남겼는데 그게 다 우리 양근의병 양근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는 “구완회교수가 제천에서 원주로 가다가 찍은 것” 하면서 제천의병인양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래 저희가 지평의병 행적지 이천리를 탐방하면서 제천에 있는 의병기념사 앞에 회장님 앞에 아주 단호하게 말씀 올렸어요. “제천에서 쓰고 있는 제천의병이라고 일컫는 의병사진 두장은 다 우리 양평사진입니다.” 말씀을 드렸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눈이 둥그래지면서 깜짝 놀랬습니다. 왜냐하면은 제천의병이라고 자랑하고 이렇게 각 문헌이나 유인물에 써 먹어 오던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니까 그분들은 타격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보고 “앞으로 지평의병이 활동한 무대가 제천이니까 사촌처럼 지내자” 이렇게 그쪽의 회장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가 또 많이 배웠습니다. 거기는 기념사학회라는 것을 결성을 해 갖고 기념사학회 위주로다가 분기별로든지 아니면 1년에 두 번이든지 어디에 제천과 연관되는 의병자료가 있다면은 이렇게 원문을 뒤에다 수록을 하고 이런 책자를 아주 간간히 발간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산을 세워 갖고 대학교 전문교수님들한테 주제를 줘 갖고 세미나를 제천서 여는겁니다. 그러면서 이걸 또 책으로 또 세미나를 한 내용을 갖고 책을 만들어서 제가 도서관에 가 보니까요 서점도서관에 이런게 배포 안된데가 없어요. 그래서 좀 더 차원있게 우리 위원님들이 이런 것도 검토해서 언제 기회가 된다면은 우리 양평이 대단한 고장이니까 세미나도 개최하게끔 좀 많이 검토를 해 주시고 또 이런 책이 꾸준하게 나올 수 있게끔 검토를 해주시고 그래서 양평의병기념사학회가 위원님들 재임중에 양평에 결성되면 그것이 후대가 100년후, 200년후가 되도 몇대 위원님들이 기념사학회가 되도록 이렇게 만들었다는 역사에 기록이 남는게 되지 않는건가 이렇게 생각이 되지고요, 저는 아무튼 이런 귀중한 시간을 관심갖고 하신데 대해서 엄청 존경스럽고 제가 또 여주사람 입장으로는 엄청 부럽습니다. 저는 여주에 가서 유지인사, 공직자들한테 양평의 의회에서는 양평의향지가 편찬되도록 배려를 해 주시고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걸 저는 자랑을 하고 또 이게 경기도를 전체를 보더라도 이런 분위기 시스템을 갖고 상근하면서 이렇게 일을 해 나가도록 배려된데는 아마 양평의회 하나에서 양평의향지편찬위원회가 그래도 가장 유일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돼 집니다. 너무나도 귀한 특위를 구성해 주시고 또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신데 너무나도 감사해서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의 말씀을 말미에 올리고 제 말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아주 고맙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김영구의장

위원장님! 한가지 요청을 좀 드리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김영구의장

15일 오후 3시쯤이 좋을 것 같은데 임종선선생님, 또 3시 30분쯤에는 문화원 원장님과 사무국장님을 출석요구해 주셨으면하고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출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출석요구를 보내겠습니다. 그냥 여기서 구두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휴식을 위해서 10분간 정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회를 선포합니다.

15시44분 회의중지

15시56분 계속개의

성원이 되었으므로 회의를 속개 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을미의병기념비에 대한 좋은 말씀을 해 주시기 위해서 양평종고 선생님이 나오셨습니다. 자리에 앉아주시죠. 위원님들 질의하실 위원님 계십니까?

김영구의장

제가 또 할까요?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의장님 질의하시죠.

김영구의장

지금 참석해 주신 유선생님은 대학시절에도 사학을 전공하신 겁니까?
고인

참고인

유명식 예, 그렇습니다.

김영구의장

현재에도 그러면 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까?
고인

참고인

유명식 예, 그렇습니다.

김영구의장

을미의병기념비문 앞쪽에 보면은 잠깐 몇줄을 읽겠습니다. 「왜적은 시랑과 같은 야만성을 들어내어 고의로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병탄을 목적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김홍집, 정병하등 간적을 사주하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을미의병기념비문과 연계해서 과연 비문에 이분들이 개화파이신 이분들이 간적으로 사주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당시에 위정척사 측면에서 볼 적에 또 지금 현재로 조명되는 것 이런 것은 학생들을 가르키시는 선생님 입장에서 또 사학을 전공하신 입장에서 한번 말씀을 해 주십사 하고 부탁을 드립니다
고인

참고인

유명식 제 나름대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긍정적으로 볼 때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 아주 좋은 뜻이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좀 부정적으로 볼 때는 그 당시 양반중심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좀 심하게 말하면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고자 했던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항해서 개화당은 우리 근대국가로 나가는 그런 발전방향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근대국가라 함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 갑신정변도 일으켰었고요, 많은 노력을 하신 분들입니다. 물론 일본의 침략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이용된 측면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이 역사발전 방향이 합치되는 방향으로 개화 등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간적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입니다.

김영구의장

저도 이상입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더 질의하실 위원님 안 계십니까? 선생님! 이왕 나오셨으니까 이외에 더 좋은 말씀 하실 사항은 없으십니까?
고인

참고인

유명식 여러 위원님들께서도 아마 알고 계실텐데요, 김백선장군 문제가 그전부터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김백선장군은 지평출신 의병장입니다. 평민출신 의병장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을미의병 때까지만 하더라도 의병장들은 대부분 양반출신 의병장들입니다. 양반출신 의병장과 평민출신의 김백선의병장이 같이 활동하다 보니까 아마 많은 의견충돌이 있었을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김백선장군이 항명죄로 처벌됐습니다. 의견충돌에서 온 갈등이었었지 항명으로 몬다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마치 김백선장군이 의병활동에 누를 끼쳐가지고 처형된 것 처럼 서술된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이 기회에 고쳐졌으면 합니다. 이상입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하여튼 바쁘신 시간에 이렇게 좋은 말씀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박선배위원

그러면 선생님은 지금 이 부분이 잘못됐다고 인정을 하시는거죠?
고인

참고인

유명식 그런 두 구절은 좀 시정됐으면 하는 뜻입니다.

박선배위원

시정이 됐으면 선생님 사견으로 어떤 저걸로 고쳤으면 좋다고 생각하세요?
고인

참고인

유명식 먼저 간적이라는 용어자체가 빠져야 되겠고요, 거기 개화당 인물들이 굳이 거론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본의 침략의도는 사실 있었지마는 개화당을 일본에 이용했다는 그런 측면도 있었지만 개화당이 간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박선배위원

그리고 일부에서는 처형을 빼야 된다고 그러는데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을 하세요?
고인

참고인

유명식 당연히 항명죄로 처벌된 것은 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선배위원

처형을 빼야 된다?
고인

참고인

유명식 예, 의병장들간의 의견충돌에서 온 사안이었었기 때문에 군기위반으로 처형됐다는 말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박선배위원

처형이 된 것은 된 것 아니예요?
고인

참고인

유명식 그렇지만 거기 비문 내용은 제가 정확하게는 기억 못하지만 항명죄, 군기위반 이런식으로 해서 처형됐다고 적혀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놔두게 되면 김백선장군이 의병진영을 어지럽혔다는 뜻이 됩니다.
영호

이영호위원장

예, 수고 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의병기념비문에 참고인 진술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특별위원회 위원여러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을미의병기념비및김찬제유허비진상조사특별위원회 제2차 위원회 산회를 선포합니다.

16시02분 산회

출처 경기 양평군의회 회의록